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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빌

세 번의 Miss Saigon, 웨스트엔드 25주년 기념 공연


홍광호 배우의 웨스트엔드 입성 소식이 들려왔을 때, 나는 영국에 있었다. 맨오브라만차 이후 놓친 홍의 공연이 대체 몇이더냐... 살짜기 옵서예, 노트르담 드 파리, 단독 콘서트... 그에 대한 보상인가. 오랜 팬으로서 나는 환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 그에게 또 한 번의 자극을 받았다. 주연이 보장된 국내 무대를 1년이나 떠나 말도 편치 않은 이국에서 조연으로 무대에 서야 한다는 게 간단한 결정은 아니었으리라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한국계 배우가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한 전례는 있지만, 순전히 한국에서만 살고 공연해 온 배우로서는 최초의 사례라는 것도 팬으로서 뿌듯했다. 


주요 조연이라고는 해도 미스 사이공의 투이면 극 전체 대비 등장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홍을 보겠다고 반복 관람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예견된 수순이었을 뿐. 웨스트엔드에서까지 반복 관람을 하게 될 줄이야... 그래도 외부 제약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반복 관람 행태는 자제할 수 있었고, 지금껏 총 세 번의 미스 사이공을 관람했다. 관람할 때마다 약간의 캐스트 변화가 있었던 것도 좋았다. 오랜만에 보는 미스 사이공은 작정하고 칼 갈고 내 놓은 게 엄청나게 화려하고 볼거리로 가득했다. 놀랍게도 이전의 불편했던 느낌은 거의 받을 수 없었는데, 이전 무대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아마도 연출이 많이 바뀌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웨스트엔드에서의 미스 사이공 관람을 앞둔 분께 드리는 팁은 무조건 드라마에 빠져들 수 있는 무대 가까이에서 관람하시라는 것. 1~3열은 너무 가까운 느낌이고, 극장이 크지 않아서 Stall이면 5~10열만 해도 가까운 느낌. 특히 1~3열 가장자리에서는 놓치게 되는 무대가 좀 있으니 측면에 앉게 된다면 5열 이후쯤이 적당하지 않나 싶다. 홍 배우에 포인트를 둔 관람이라면 무대를 바라봤을 때 살짝 우측 좌석이 어떨까 싶다. 커튼콜에선 홍이 좌측에 서긴 하지만 중요한 건 공연 중의 연기니까. 나는 세 번 내내 좌측에 앉았었는데, 중요한 순간에 홍투이가 객석의 우측을 바라볼 때가 많아서 그 때의 표정이 많이 궁금했었다. 특별히 홍만 보겠다는 게 아니라면 앞쪽 좌측이 나쁘지 않은 게 킴과 크리스의 대부분의 연애씬이 무대를 바라봤을 때 우측 위쪽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중앙에 앉는 게 아니라면 오히려 반대편에서 좀 더 시야장애 없이 전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보다 두 연인의 표정을 가까이서 보고 싶다면 우측에 앉아도 무방하겠다. 적다보니 결국 Stall 앞쪽 자리라면 어디에 앉아도 크게 무리가 없다는 얘기가 되어버린다. 표 예매할 때 시야장애가 조금이라도 있는 곳은 좌석 선택할 때 명시가 되니 참고하면 될 것. 아, 그리고 홍투이는 8월 중순부터 2주간 휴가란다. 정확히 중순 언제인지는 물어도 답을 않더라; (대체 왜???) + 8.18~8.31일까지 휴가라는 소식


  1. 2014/05/20 19:30 Prince Edward Theatre

    프리뷰 첫 공연 때 달려가고 싶었지만, 스케줄이 허락하지를 않아서 자체 첫공을 5/20일로 미뤄야 했다. 바로 다음 날이 프레스 나잇이었으니 내가 프리뷰 마지막 공연을 봤다고 하면 되려나. [미스 사이공]이라는 극 자체에 대한 편견 때문에 약간 심드렁하게 갔다가 공연 끝나고 너무 흥분해서 늦은 새벽까지 한동안 잠들지 못했었다. 최소 몇 년간은 [미스 사이공]만 공연할 전용 극장이니 가능하겠지만, 무대 미술에 엄청나게 돈 들인 티가 그대로 난다. 실물이 등장하는 헬리콥터 씬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3열 가장자리에 앉았었는데 모래 바람이 불어치듯 바람까지 재현해낸 헬리콥터 씬에선 소름이 다 돋았었다. 

    연출을 달리 해서인지, 내 관점이 달라져서인지, [미스 사이공] 하면 좀 불편했던 이전의 느낌을 찾을 수 없었다. 아메리칸 드림이 얼마나 헛된지, 베트남에 대해 프랑스와 미국이 얼마나 무책임했는지를 오히려 잘 표현한 것으로 보였고, 전쟁에 기인한 개인의 비극을 처절하게 보여준다는 생각을 했었다. 동조하진 않지만 엔지니어, 그의 드림랜드와 태국의 홍등가는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처참했다. 예술의 힘은 결국 역사에 존재하는 개인의 이야기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다루느냐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번 [미스 사이공] 프로덕션은 매우 성공적이라는 인상이다.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화려한 볼거리에 아름다운 음악까지 지금 웨스트엔드에서 새롭게 관람할 수 있는 이만한 공연이 없다.

    크리스를 맡은 배우에 대한 혹평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봤는데, 나는 이 배우 나쁘지 않았다. 그냥 딱 G.I. 크리스스러웠달까. 아직 공연 초반이라 노래 호흡이 조금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배우 체격, 음성, 분위기 모두 크리스에 어울렸다. 그리고 세 번째 관람에선 이 크리스에게 심지어 마음이 움직이게 된다. 

    홍 배우의 투이는 내가 본 투이 중 가장 감성이 풍부한 투이여서ㅡ눈물 흘리는 투이는 난생 처음 보는 것 같았다ㅡ홍의 해석인지 연출의 디렉션인지 몹시 궁금했는데, 지극히 순정적이고 처연한 투이 덕분에 투이 시점에서 극을 관람하게 되었달까. 자신의 신념이 있는 정치적인 인간인데다가 킴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는 인물인 투이는 [미스 사이공]에서 킴 이외의 유일한 영웅이 아닐까? 물론 그 신념이 다 옳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또 다른 비극이 펼쳐졌지만. 

    커튼콜 때 심하게 호들갑을 떨어서 주변의 눈길을 샀다. 앞쪽에서 열심히 환호했더니 홍 배우도 팬인 걸 알아보고 손 흔들어주어 기쁘기도 했지. 하지만 스테이지 도어에서의 홍은 한국에서보다도 데면데면하고 차가워서 서글펐더랬다. 


  2. 2014/06/12 19:30 Prince Edward Theatre
    * Kim - Tanya Manalang (Alternate)

    재정적인 면을 무시할 수 없어 두 번째 관람에선 한 급 아래 카테고리 좌석에 앉아서 봤는데 무대가 너무 멀어서 생생함이 떨어져 아쉬웠다. 무대가 멀어진 만큼 집중력도 떨어지고 '구경'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첫 번의 흥분을 되새길 수 없었던 게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첫 번 관람 때 너무 광분을 했던 건지 이번에는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약간 거리감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지난 번엔 킴을 메인 배우로ㅡ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관계로 학업 문제로 일주일에 공연을 많이 서지는 않는단다. 5월엔 일주일에 네 번 정도라고 했던 것 같은데...ㅡ이번 관람에선 얼터 배우로 킴을 만나게 되었는데, 얼터라고는 해도 노래 실력이 워낙 뛰어나서 메인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것도 무의미하다 싶기는 하지만 벌써 팬덤이 형성되어 각 배우의 팬들끼리 서로 자기네 배우가 낫다고 다툰다고도 하고, 나 역시 두 배우를 모두 만나고 보니 선호가 생기더라. Tanya는 메인 배우인 Eva보다 음성은 약간 더 성숙한데 신체적으로 과하게 마르고 작아서 크리스랑 있는데 아버지와 딸 같은 비주얼 쇼크로 둘의 연애가 범죄로 보이는 탓에 둘을 연인으로 인식하는데 한참의 적응기가 필요했다. 목소리나 외모가 오히려 좀 더 앳되고 귀엽지만 크리스와 함께 있을 때 마음이 불편해지지 않는 체격이어서 그런가, 나는 Eva쪽이 좀 더 좋더라. 세 번째 관람에서는 그녀의 파워풀한 모습에 새삼 반하기도 했고. 

    내게 홍투이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하고 있으므로 추가할 코멘트가 마땅치 않은데 2막 Kim's Nightmare에서의 투이는 정말 무시무시하게 노래를 잘해서 [오페라의 유령]의 팬텀까지 어떻게 소화할 수 없을까 하는 팬으로서의 욕심이 생기더라. 웨스트엔드/브로드웨이 무대에서 비주류인 동양인 배우으로서 설 수 있는 무대가 굉장히 제한적이지만 팬텀은 가면 쓰고 나오거나 목소리로만 나오니까 못할 것도 없잖아? 홍의 딕션이 아쉽다는 평도 있는데 A-Z까지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는 원어민이 아닌 내게는 뭐라고 하는지 대강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라 별로 거슬리진 않는다. 하지만 세 번째 관람을 함께 한 친구의 말처럼 어째서 홍에게만 영국식 발음을 구사하게 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원래 홍 딕션이라면 굉장히 훌륭한데. 

    Kim's Nightmare에서 Fall of Saigon으로 이어지는 연출이 소름 끼치게 좋아서 지난 번도 이번에도 이 부분에 있어서만은 열광했다. 킴의 
    악몽 속 투이의 환영과 3년 전 크리스가 앞뒤로 나란히 엇갈리면서 순식간에 과거로 플래시백. 그리고 대사관 안팎에서 철망 사이로 결국은 만나지 못하는 킴과 크리스.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아우성치는 베트남 사람들. 철망의 안팎을 속도감 있게 점점 객석 가까이로 밀고 들어오다가 엄청난 굉음과 함께 등장하는 헬리콥터!!!! 아, 공연 한 중간에 마구 박수를 치고 싶어지게 만든다. 스토리상으로 이 때 박수치다가는 돌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이지만, 극 전체를 통틀어 이 두 넘버의 시퀀스가 백미가 아닐까 싶다. 

    홀로그램으로 첫 등장하는 헬리콥터는 곧바로 실제 크기로 보이는 헬리콥터로 제 모습을 드러내는데, 조명, 음향, 바람, 배우들의 연기의 합이 정말로 저 멀리서 헬리콥터가 날아오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3열에 앉았던 첫 번 관람에서는 엄청난 바람 때문에 헬리콥터의 등장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는데, 이번 관람에선 1층 객석 뒤쪽에 앉았더니 바람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조명은 다시 봐도, 깊은 밤에서 이른 새벽으로 이어지는 여명 같은 Why God Why에서의 조명부터 The American Dream의 쏟아지는 햇살 또는 흩뿌리는 빗줄기같은 조명까지 전체적으로 흠 잡을 데가 없다. 프로그램 북 보니까 조명감독만 기존의 팀에 새롭게 참여하는 것 같던데 아주 멋지게 역할 소화하고 계신 듯.  

    아, 이번 프로덕션
    에서 딱 하나 마음에 안 드는 건 엘렌이 크리스 엄마 내지는 이모로 보인다는 거... 유일한 미스 캐스팅이라고 여겨질만큼 나이가 들어보여서 이입이 힘들다. 크리스가 너무 힘들어서 엄마 같은 연상한테 빠진 건가보다 합리화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합리화를 해도 참 거슬린다. 공들여 찾은 배우인데 제작팀이 왜 이 배우를 선택한 건지 궁금. 그와 별개로 Now I've Seen Her를 대체하는 새로운 곡인 Maybe는 참 좋다. 멜로디도 좋고, 엘렌에게 충분히 이입할 수 있게 해준다. 

    같이 관람한 일행은 [미스 사이공]을 처음 봤는데 지지리 궁상 스토리라며 너무 싫어했다. 이걸 보면서 훌쩍이는 관객들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시절 너무나 있었을 법한 이야기라는 데에는 친구도 공감했다. 그래도 킴의 그런 결정이 너무 궁상스러워서 싫다고. 미스 사이공을 보이콧하는 캠페인이 있는 걸로 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캠페인을 벌이는 이유는 이 극이 묘사하는 킴, 킴이 대표하는 베트남 여성, 전쟁 속의 여성에 대한 이미지 때문인 것으로 안다. 그들의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나는 [미스 사이공]의 결말은 이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ㅡ물론 푸치니의 [나비부인]의 리메이크라는 것도 고려해야 하고ㅡ킴의 입장에선 아들 탬을 크리스에게 보내는 가장 최선의 방법을 택한 것이고 (They think they'll decide your life. No, it will be me. 라는 킴의 가사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극중 내내 아들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고 전면적인 복선을 깔고 있기도 하지만, 비록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더라도 투이를 살해했던 킴의 죄가 이렇게 단죄될 수밖에 없다는 개연성도 있어보인다. 크리스가 남기고 간 총으로 투이를 죽이고, 투이를 죽인 그 총으로 다시 자기 자신을 죽일 수밖에 없는 킴의 비극적 운명이랄까. 


  3. 2014/07/14 19:30 Prince Edward Theatre
    * Ellen - Carolyn Maitland (Understudy)

    두 번째 관람 때 흥을 좀 잃어서 세 번째 관람이 걱정스러웠는데 이게 웬걸. 첫 번째 관람 때 만큼이나,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이상으로 좋아서 '아, 세 번의 관람으로 완성이 되었다'는 기분과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마음이 엇갈렸다. 아마, 재관람 없이 귀국하게 될 것 같다. 

    한 달 만의 재관람인데 약간의 변화가 느껴졌다. 크리스가 킴에게 홀딱 빠져서는 휴가를 몽땅 몰아서 쓰겠다고 대사관에 있는 존에게 전화를 하는 장면에서 통화가 길어지자 공중전화 순서를 기다리는 베트남 사람이 빨리 끊으라며 닦달할 때 크리스가 권총을 들이대며 그 사람을 쫓아버렸었는데 이 장면에서 권총을 꺼내드는 부분이 삭제되었다. 유약한 크리스의 성정에 맞는 조정이었다. 아무리 전쟁이고, 미쳐있다고는 해도, 크리스 성격에 거기에서 권총을 들이대는 건 영 어색하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이번에는 Eva가 킴으로 섰으면 좋겠다 했는데, 다행스럽게 Eva를 다시 볼 수 있었다. 크리스와 연인으로서 좀 더 어울려보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열 여덟인가 하는 이 배우가 보여주는 어머니로서의 킴이 너무나도 파워풀해서 You Will Not Touch Him에서 그 에너지에 감동하고 말았다. 레아 살롱가가 워낙 센세이셔널한 데뷰를 하고 이후에도 승승장구했던 것처럼, Eva의 킴도 그런 첫걸음이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물론 25년 전과 지금의 뮤지컬 판도가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이번 관람에선 모든 인물을ㅡ여전히 존은 급변한 탓에 그 위선적인 정도가 더욱 도드라지지만ㅡ납득할 수 있게 하고 또 그들의 비극에 이입하게 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굉장히 좋았다. 크리스의 섬세한 연기가 특히 빛났는데, 그 때문에 마지막 장면에서 정말로 마음이 아파졌다. 왜 욕 먹는지 잘 모르겠는 Alistair의 크리스는 극중 크리스로서 적역이다. 물론 커튼콜에서도 스테이지 도어에서도 '개자식' 크리스는 인기남이 아니다. 하지만 Alistair의 크리스는 나쁘고 위선적이어도 이해가 간다. "I'm American, how could I fail to do good?"이라는 대사가 우습게 들리지 않는 크리스다. 어리고 유약하고 정말 몰라도 뭘 몰랐던 크리스는 진심으로 저렇게 생각했을 거다. 그래서 밑도 끝도 없는 미국인의 자부심은 우습지만 크리스의 저 대사는 우습지가 않다. 나름의 최선을 다했고, 죄책감을 떨쳐내고 싶어서 안간힘을 써도 그 나름의 최선이 실은 완전한 최선이 아니었다는 걸 저 자신도 알기에 불안하기 그지 없는 현재의 '여전히 젊고 서툰' 크리스의 모습은 엘렌과의 The Confrontation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존에게 자신들의 결정을 합리화하면서 보이는 크리스와 엘렌의 위선적인 태도도 압권이고.   

    이번 관람에선 언더스터디 엘렌이 무대에 섰는데 메인 배우보다 훨씬 좋았다. 프레스 나잇 때 처음 무대에 서고 이번이 두 번째라는데 관객으로서 운이 좋았다. 여름철이라 메인 배우들이 돌아가면서 휴가 중이어서 얻은 행운이기도 하고. 일단 메인 엘렌보다 적어도 일곱 살 이상은 어려보여서 크리스와 합이 잘 맞는다. 메인 엘렌은 외모도 그렇지만 발성도 노숙해서 영락없는 아주머니 느낌을 지우기가 힘든데, 언더스터디 엘렌은 젊은 새댁스러워서 날벼락 맞은 엘렌의 입장이 훨씬 더 와닿는다. 사실 이 극에서 엘렌만큼 황당한 입장에 처한 인물이 또 어디 있나. 그래도 과거 있는 남자를 사랑으로 감싸고, 남편의 과거 여자와 갑자기 나타난 아들을 만나러 여행을 떠나는 남편을 동반하기까지 하는 대인배. 하지만 킴을 만나고 나서는, 그녀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과거'의 여자가 아닐 수도 있고, 어쩌면 크리스가 단 한 번도 온전히 자신의 남자가 아니었을 지 모른다고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크리스에 대한 희망을 품는 모습이 인간적이다 못해 따뜻하기까지 해서 엘렌이 방해꾼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그저 안쓰러운 또 다른 피해자로 보인다. 곡의 변화를 두고 엘렌이 느껴야 하는 강렬한 배신감도 사라지고 극도 늘어지게 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Her or Me > Now I've Seen Her > Maybe 로 진화해 온 캐릭터 해석에 나는 찬성하는 입장. 이번 프로덕션에서는 투이와 엘렌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보조 역할 같지 않게 모두 생생하다. 

    [미스 사이공]의 실제 주인공에 다름 없는 엔지니어에 대한 코멘트를 아꼈는데, 초연 앙상블 때부터 쭉 함께 했다는 Jon Jon Briones는 엔지니어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엔지니어다. 친구 말을 빌어 이 지지리 궁상스러운 극의 유일한 코믹 릴리프이자, 관객의 환호를 가장 열렬히 이끌어내며, [미스 사이공]의 나레이터이기도 한 인물. 심지어 커튼콜에서조차 킴 다음으로 등장하는 인증된 주인공. 그의 삶의 양태에는 강력히 반대하지만, 역시 현실에 충분히 존재하는 생명력 강하고 기회주의적이며 결코 개과천선하지 않는 인물인지라 그로 인해 떠올리게 되는 인물들이 많지. 현실에 존재할 때는 가장 용서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인간이지만, 그가 연기하는 [미스 사이공]의 엔지니어는 탁월하다.

    홍투이는 프리뷰 때부터 안정적이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건 배우의 버릇이기도 한데 상체를 자꾸 굽히는 건 교정을 좀 했으면 싶다. 킴을 설득하려 할 때 상대방에게 좀 더 다가가려고 상체를 숙이는 게 이해가 가긴 하는데, 구부정해 보여서 별로이기도 하고 투이라면 조금 더 꼿꼿해도 좋을 것 같아서. 연출도 뭐라고 않는 걸 일개 관객이 왈가왈부할 수 있겠느냐만은 우리 배우 좀 더 멋져보였으면 좋겠다는 팬심에서 비롯한 한 마디. ;-)

    아, 이 날의 마음 아팠던 엔딩에 대해선 꼭 적어두고 싶다. 총소리를 듣고 상황을 직감한 크리스가 클럽으로 뛰어들어가 킴을 품에 안는다. 바들바들 떨며 죽어가는 킴이 크리스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 맞추려 한다. 킴과 재회한 크리스는 과거로 덮어두었던 킴에 대한 사랑이 현재로 밀려오는 것을 느끼지만 엘렌의 현 남편으로서의 자아 때문에 처음엔 저항하다가 결국 굴복하며 킴에게 열렬히 입맞춘다. 그리고 킴은 숨을 거둔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아이처럼, 정말 아이처럼 흐느끼며 크리스는 킴을 흔들고 또 흔든다. 지난 번에도 크리스가 저렇게 아이 같았나? 지난 번에도 크리스가 저렇게 킴을 흔들었었나? 크리스의 섬세한 연기가 너무 좋아서 가슴 한 구석이 찡하게 아파왔다. (너무 이입한 탓에) 그 어느 때보다 한숨을 푹푹 쉬며 관람했지만, 엔딩까지 모든 감정이 섬세하게 살아있는 느낌은 참 오랜만이었다. 스테이지 도어에서 Alistair에게 짧게나마 이런 감상을 전하고, 되려 고맙다는 인사를 받은 것도 다정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