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 탄생하는 과정에서는 <문자를 만든다>는 일 자체가, 그 시대와, 그 시대의 <지> 안에서 의문의 대상이었다. 한글을 만들려는 지성들이 있었던 한편에는, <문자를 만든다>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며 자기 존재를 걸고 항의하는 또 다른 지성들이 있었다. "이런 구조의 문자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구조의 문자는 바로 <지>의 파괴를 초래한다"고 주장하는 지성들이었다. 그들의 물음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문자가 만들어졌다고 해서 누구나가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사용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문자가 있다고 해서 곧 <문장>이나 <텍스트>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문자는 <문장>으로, 그리고 <텍스트>로 비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단순한 성장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가 텍스트가 되려면 전혀 다른 지평을 획득하여야 한다. 옛 현인의 말을 빌린다면 <목숨을 건 비약>이 필요한 것이다. 텍스트가 될 수 없는 문자는 각인된 흔적이나 먹의 농담 등으로 존재할 뿐 문자로 있을 수조차 없다. 문자를 만든 지성들은, 이에 과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한편 <쓰기>를 위한 문자의 모든 시스템과 기법도 전부 물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신체가 있고 붓이 있고 먹이 있고 종이가 있고 서법이 있고 인쇄술이 있고 책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텍스트가 숨 쉬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문자는 이것들까지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이윽고 그 문자로 쓰여지는 것 자체가 사색이 되고 사상이 되고 사조가 되고 정치가 된다. 문자로 살고 언어라는 것을 묻는 일은 때로는 인간의 존재까지도 위협한다.
한글이라는 문자를 만들어 낸다는 것. 거기에는 문자를 둘러싼 물음을 뛰어넘은, <쓰기>라는 영위와 <쓰여진 것>, 즉 <에크리튀르>를 둘러싼 물음이 존재한다. 더 나아가 여기에는 인간의 <지>를 둘러싼 거대한 물음이 넓게 가로놓여 있다. 한글의 탄생이 이렇게 <지>를 둘러싼 드라마이기도 함을알게 될 것이다.
ㅡ 책머리글 中
일본인 한국어학자가 쓴 한글에 대한 글을 읽었다.
일본어 화자를 대상으로 쓴 글이라 중간중간 이해가 쉽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한글의 탄생을 지의 혁명으로 풀어내는 이야기의 힘이 상당하다.
문자의 탄생이라니... 기원을 알 수 있는 문자를 우리가 사용하고 있다는 현실이 곱씹고 또 곱씹어봐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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