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공연은 끝나고 난 뒤 그 느낌이 새어나갈세라 무의식 중에 어깨를 움츠리고 극장문을 나서게 한다. 지난해에는 뮤지컬 <스위니 토드>가 그랬고, 올해는 뮤지컬 <씨왓아이워너씨>가 그랬다. 이 두 공연이 관객의 마음에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면 그 중 상당 부분은 홍광호의 목소리 때문이었으리라. 까까머리 소년 토비아스가 러빗 부인에게 부르던 'Not While I'm Around'는 어떤 사랑의 세레나데보다 아름다워 성스러운 기운마저 감돌게 만들었고, 소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불한당 중의 불한당으로 강도 역할을 완벽히 소화하며 예기치 못한 흥분을 안겨준 젊은 배우. 홍광호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워지는 가운데 그가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새로운 지킬로 등극하자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부디 신화가 되어달라는 바람을 전할.
editor_김아형
photographer_윤석원
Q. 당신이 부른 '지금 이 순간' 영상이 인터넷을 통해 상당히 많이 퍼진 것을 알고 있나요? 특유의 맑고 강한 목소리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들어보니 단순한 노래 한 곡이 아닌 마치 드라마 한 편처럼 소화했던걸요. 마디마다 극 전반의 느낌이 배어 나와 자연스레 홍광호의 지킬에 대한 기대가 커지더라고요.
A. 군대 휴가 때 (조)승우형의 공연으로 <지킬 앤 하이드>를 처음 봤는데 너무 좋아서 충격을 받았어요. 나중에 꼭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밀려와 곧장 CD를 사서 노래들을 따라 부르곤 했으니 오디션 전에 주요 넘버들은 다 외우고 있었던 셈이죠. 특히 '지금 이 순간'은 그 동안 아주 많이 불러보았고 그렇게 불러야겠다고 마음 먹은 지도 오래됐어요. 웬만하면 악보를 준수하는 편인데 이 곡은 감정 표현할 부분이 무척 많거든요. '여기서는 이렇게 불러야겠다' 하는 부분들이 모이다보니 저만의 '지금 이 순간'이 된 거예요.
Q. 기대와 관심이 쏟아지고 있지만 앳된 외모 탓인지 지킬을 하기에 이른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는데요.
A. 너무 해 보고 싶었던 작품이라 신나고 행복하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 보완해 가는 단계예요. 솔직히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부담으로 시작했는데 연습하면서 털어냈어요. 지킬 선배인 (류)정한이형, (김)우형이형이 함께 하고 있어서 도움 받는 부분도 많았고요. 따져보면 뮤지컬에서의 헨리 지킬은 소설과 달리 서른 안팎의 '젊은' 의사로 설정되어 있어요. 딱 제 나이죠. (웃음) 어려 보여서 그렇지 스물일곱이면 어린 나이가 아니거든요. 우형이형도 저보다 더 어린 나이에 지킬을 했고, 심지어 승우형은 스물넷에 이 작품을 시작했는걸요.
Q. 그토록 바라던 작품인데 실제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선 소감은 어떤가요.
A. 의상도 많고 가발까지 있어서 제 몸에 빨리 붙는 게 관건인데 적응하는 중이에요. 무대에서도 제 동선이 자리를 잡도록 세트와 조명 아래 적응하고 있는 한편 관객들이 들어왔을 때 달라지는 공기에도 적응해가고 있어요. 그래서 매 씬에 들어가기 전에 그 씬이 보여줘야 할 목적이 뭘까 생각해요. 반대로 내가 그 씬에서 가져야 할 목적도 생각해보고요.
Q. <씨왓아이워너씨>의 공연을 하면서 <지킬 앤 하이드>의 연습을 하느라 시간도 빡빡하고 몸도 힘들었을 텐데요. (실은 지난 달에 인터뷰를 잡아놓고 크게 앓아서 미뤄졌다)
A. 그랬죠. 스케줄 조정을 잘해줘서 크게 힘든 점은 없었으나 감정이 버거워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애썼지요. (웃음) <씨왓아이워너씨>의 출연은 이미 약속된 것이었고, <지킬 앤 하이드>는 내가 너무 하고 싶었던 작품이라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원래 다작을 싫어하지만 앞으로는 절대 두 작품의 연습과 공연을 병행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씨왓아이워너씨>의 경우는 연출가와 대화가 부족해서 이해를 못하는 부분들을 안은 채 무대에 올랐어요. 공연하면서 아쉬운 부분들을 선배들과 함께 채워갔지요.
Q. 작업할 때 연출가와 대화를 많이 하고 의견도 적극적으로 내는 편인가봐요.
A. 저는 무조건 연출가를 신뢰해요. 배우는 믿어야 하는 입장이라 의심이 나면 대화를 많이 하려해요. 그런 점에서 데이빗(스완)은 잘 맞고 잘 통해요. 배우가 가진 색을 인정해주고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해줘요.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제가 생각하는 지킬은 마냥 부드럽고 신사적인 남자가 아니라 열정적이고 추진력 있는 사람인데 그런 견해도 잘 수렴해주시더라고요.
Q. 모두가 반대하는 실험을 강행하고 스스로를 실험대상으로 택하는 걸 보면 당신의 해석이 일리가 있어요. 선과 악의 극단을 넘나드는 지킬과 하이드를 연기하기 위해 어떤 점들을 연구하고 고민했나요. 홍광호만의 해석이 궁금한데요.
A. 선악을 분리하는 실험은 실패가 아니라 지킬 스스로가 더 흥미롭고 매력적인 악을 선택한 결과일 뿐이에요. 지킬과 하이드는 결코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이드는 지킬이 필사적으로 누르고 있던 또 다른 자아잖아요. 루시에게 한눈에 끌리지만 인정하지 않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 친구하자"며 명함을 건넨 지킬이 이성을 버리고 하이드가 된 순간 가장 먼저 루시한테 간단 말이죠. 그러면서 악도 진화를 하죠. '나도 몰랐던 나'라는 곡이 대변하듯 하이드의 초반 모습과 후반 모습은 다르거든요. 저 역시 하이드를 연기할 때 아드레날린 분비가 증가하는 것 같아요. (웃음) 요즘 의문은 '지킬과 하이드가 서로의 행적을 기억하느냐'인데 연출님과 상의해본 결과 마치 꿈에서 본 듯 서로를 느끼다가 후에 꿈이 아닌 현실임을 알게 된다는 쪽으로 좁혀졌어요. 그렇게 궁금증이며 작품의 오류를 하나 둘 채워나가는 재미는 연습의 재미와는 다른 성취감이 있어요.
Q. 작품에 대한 해석력도 좋지만 음악적 해석력이 뛰어난 배우라는 평가를 많이 받는데요. '지금 이 순간'뿐 아니라 다른 작품의 다른 곡을 들어봐도 홍광호란 배우의 색깔은 확연히 다르거든요. 그런 '자가편곡'은 악보에 능통하기에 가능한 게 아닌가요. 악기도 잘 다룬다고 들었는데요.
A. 어렸을 때 배운 클라리넷 덕에 군대를 군악대로 갔어요. 거기 있으면서 색소폰, 드럼 등 다양한 악기들을 배울 수 있었고, 오케스트라의 악기 구성, 악보에 관한 것 등 음악 전반에 대한 지식도 많이 익힐 수 있었지요. 시간이 멈춘다는 군대 2년이 저에겐 유학을 간 것보다 더 좋은 경험이 되었으니 전 정말 운이 좋은 거예요. 더구나 군악대의 특성상 CD를 맘껏 들을 수 있어서 그 때 뮤지컬 CD도 참 많이 듣고 많이 불러보고 했거든요.
Q. '지구에서 가장 노래를 잘하는', '가장 매력적인 목소리'의 홍광호는 그렇게 탄생했군요. 조승우, 박해미 등 선배들의 칭찬세례는 이미 많이 회자됐는데 솔직한 본인의 생각은 어떤지요. 노래에 대한 재능은 타고난 건가요.
A. 그런 이야기 들으면 황송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인지도가 없던 시절 오디션에서 수차례 떨어진 경험이 있어요. 그러다 외국 연출팀이 심사하는 <미스 사이공> 오디션에서 크리스의 커버 역으로 뽑히며 서서히 길이 열린 셈이죠. 노래에 대한 재능은 먼저 뮤지컬 배우의 길을 걷고 있던 누나(홍별님)을 따라 계원예고에 들어가면서 발견했지, 그 전엔 노래방에 머물러 있었어요. (웃음) 우리 남매는 화가이신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누나는 현재 공연예술 쪽 공부를 하고 있는데 변함없이 저의 가장 큰 지지자이죠.
Q. 올해는 스크린 신고식도 치뤘잖아요. 영화 <고고70>에서 데블스 밴드로 분한 모습은 상당히 신나고 즐거워 보이던데요. 혹 뮤지컬 외에 영화 쪽에도 뜻이 있나요?
A. 공연과 달리 영화는 순간 집중을 요하더라고요. 가릴 게 없는 무대에서는 무엇보다 정직해야 하기에 연습만이 살 길이지만 카메라 렌즈 앞에서는 연습도 없고 고민이 깊으면 오히려 독이 된다는 걸 알았어요. 좋은 경험이긴 했지만 저는 오로지 뮤지컬 뿐이에요. 혹 뮤지컬 영화라면 모를까.
Q. <첫사랑> 제작발표회 때 홍광호라는 신인이 준 신선한 충격이 아직도 선명한데요. 그 때 해수 역으로 첫 주연을 맡았지만 원톱으로 극을 끌고 가는 주인공은 이번이 처음이잖아요. 앞으로는 어떤 작품에 도전하고 싶나요.
A. 모든 작품에 남자 주인공이 존재하지만 <지킬 앤 하이드>를 비롯 <맨 오브 라만차>나 <오페라의 유령>처럼 남자주인공 한 명이 작품 전반을 끌고 가는 작품은 손에 꼽히거든요. 그런 점에서 <지킬 앤 하이드>는 독이 될 수도 있고 득이 될 수도 있죠. 지금 너무 큰 재미를 느끼고 있어서 다음 작품 하는데 분명 도움이 되겠지만 역으로 이런 작품만 찾을까 걱정도 돼요. 하지만 아무리 역할이 크고 음악이 흘륭한 작품이라도 제가 끌리고 도전해보고 싶은 요소가 있는가가 먼저예요. 한 장면을 나오더라도 제가 매력을 느낀다면 어떤 작품이든 반드시 도전할 겁니다. 중요한 건 캐릭터의 비중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니까요.
Q. 솔직히 지금의 당신에게 어느 정도의 흥분과 도취감이 느껴질 법도 한데 오히려 담담하고 미동이 없어 심지 곧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평소의 생활패턴이나 성격도 그러한가요.
A. 올해는 연습이 없으면 공연을 하고 있어서 쉴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시간이 나도 왁자지껄 노는 것보다 집에서 푹 쉬는 쪽이에요. 남다른 성대 탓에 목 상태를 점검하러 이비인후과도 가고요. 연애도 하고 싶지만 지금은 연기 생각만으로도 벅차요. (그는 등을 잘 긁어주는 여자가 이상형이라고 했다) 요즘은 부쩍 연기이론서적에 손이 많이 가요. 학교 때 읽었던 김석만 선생님의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연기의 세계>를 다시 찾아봤었는데 연기하며 들던 의문들이 많이 풀리더라고요. 배우는 무대에서 말하고 무대에서 보여줘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저는 무대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솔직한 배우이고 싶어요. 관객들에게 꾸미지 않고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려면 많이 경험하고 관찰하고 생각하는 것 외에 왕도가 없다고 생각해요.
- 12월호 Scene Playbill 中 -
'반짝반짝'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광호/윤도현의 러브레터, 2008/10/02 (0) | 2014.07.1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