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미술관, 한국 근대미술 걸작전: 근대를 묻다 (08.12.23~09.3.22)
금요일 저녁, 과장님 눈치 보고 바삐 퇴근하여 덕수궁으로 내달렸다. 회사에서 진행하는 덕수궁 미술관의 한국 근대미술 걸작전 단체관람에 신청했기 때문. 뒤늦게 미술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도슨트의 설명과 함께 관람이 시작된 이후였다.
와- 이건 또 왜 이렇게 재밌어? 이렇게 재밌는 전시는 정말 간만이다. <근대인의 삶과 꿈>이라는 주제로 230여 작품을 한데 모은 전시 규모도 그렇거니와 전반적으로 작품들이 모두 흥미로워서 한국미술사에 무지한 나조차 연신 감탄하며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전시였다. 이중섭, 박수근, 나혜석, 천경자처럼 이름 석자만으로도 일반 대중에게 친숙한 화가들의 작품 이외에도 한국 근대 미술에 익숙치 않은 대중에게는 낯선 작품들도 많았는데, 익숙한 작품을 실제로 보는 재미와 새로운 작품을 소개 받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작품 수가 워낙 많아 찬찬히 다 보지는 못하고, 도슨트가 휙휙 찍어서 설명해주는 작품만 속성으로 감상하는데도 1시간 가량이 소요되더라. 도슨트의 작품 해설이 어찌나 탁월하던지, 성실하고 친절하며 조근조근한 그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가 킬킬대다 아주 즐거웠다. 이 날의 전시가 그 정도로 즐거울 수 있었던 데에는 도슨트의 공이 상당했다는 걸 오늘 재관람 때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으니.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예술 작품 해설이나 평론은 때론 지나치게 적나라해서 다소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곤 하지만ㅡ예를 들어, '화폭이 꽉 찰 정도로 많은 정물들이 배치되어 있지만, 이 작품이 전혀 답답하거나 난삽하지 않은 까닭은 거침없는 구성을 통해 잘라낼 부분은 과감히 잘라내고 남길 부분만 남긴 데다가 안정적인 사각형의 물체를 한가운데 부각시겼기 때문'이라거나, '이 그림이 청량감을 주는 까닭은 나무 위로 쏟아지는 햇살 아래로 선명한 나뭇가지 그림자를 세밀하게 그리되, 그림자를 단순한 검정이 아니라 푸른 빛을 활용하여 표현하였기 때문'이라거나, '위쪽에서 쏟아져 내리는 사선 표현은 불안정한 구도를 만들어냄으로써 작품 전반에 불안감을 흐르게 한다'는 등 지나치게 친절한 해설을 듣노라면 살짝 민망해진다.
그렇다 해도, 이 전시만큼은 도슨트 또는 오디오 가이드와 함께 할 것을 추천. 작품 자체에 대한 해설 뿐 아니라 작품의 배경과 작가의 생애, 동시대 다른 작가들과의 관계 등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어서 굉장히 재밌다. 오디오 가이드에도 50여 작품의 설명이 녹음되어 있는데, 오늘 해 보니 이것만 차근차근 들으며 관람할래도 두 시간으로는 모자라다. 제대로 관람하려면 한 시간 정도 도슨트랑 돌아보고, 나머지 한 시간 반여는 도슨트가 설명해주지 않은 작품 위주로 혼자 찬찬히 둘러보면 좋겠더라. 아마도 나는, 전시 마지막날인 22일까지 틈나는대로 가지 싶다. 병원 예약 없는 점심시간에 휙 다녀와도 좋겠고, 야근 안 해도 괜찮을 금요일 저녁에 어둑하고 한산한 덕수궁 산책도 좋겠고. 전시가 12월부터 시작되었다는데, 덕수궁을 지척에 두고 왜 이제서야 온 건지. 게다가 이처럼 훌륭한 전시가 무료여서 덕수궁 입장료 1천원만 부담하면 된다니. @_@
아주 심하게 붐비진 않아도 토요일 오후라 오늘은 어제보다 관람객들이 많던데, 평일 오후나 늦게까지 문을 여는 금요일 저녁시간에 가면 한산하고 여유롭게 전시를 즐길 수 있을 듯.
 천경자 | 굴비를 든 남자 (1964) 종이에 채색 120×150cm 금성출판문화재단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며 제일 많이 웃었던 작품은 천경자의 <굴비를 든 남자>인데, 이 그림은 직업적로는 성공하였으나 가정 문제 등 개인적으로는 불우했다는 천경자씨의 사랑에 대한 희망을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작품의 왼쪽 아래에 떨어져 나뒹구는 낙엽이나 오른쪽에 찢어진 우산을 보면 거센 폭풍우가 한 차례 지나간 것을 알 수 있는데, 하늘을 보면 희망의 무지개가 떠오르고 그 무지개의 끝에서는 여자가 행복한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다. 행복한 듯 춤을 추고 있는 여자는 작가 자신이 투영된 이미지이며,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는 굴비를 들고 그녀에게로 다가오고 있단다. 여자로서 사랑 받길 원했던 작가의 소망이 담겨 있는 애틋한 작품임에도 불구, <굴비를 들고 걸어오는 사랑하는 남자>라는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는데, 하필 굴비라니... 꽃도 아니고, 세련되게 포장한 선물도 아니고, 굴비라니... 그 익살 맞음에 한참을 웃었다. 남자는 역시 생활력인가, 뭐 이런 우스운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히히. 이 작품이 단박에 좋아졌다.
 이중섭 | 흰소 (1954) 합판에 유채 30x41.7cm 홍익대학교 소장
그리고 워낙에 유명한 이 작품. 홍익대로부터 어렵게 어렵게 대여하였고, 이번 전시 끝나고 들어가면 몇 년 후에나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른단다. 옆집 소를 매일매일 하도 관찰하다가 고소까지 당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소에 미쳤던 이중섭 선생의 <흰소>를 놓치지 마시길.
 장욱진 | 까치 (1958) 캔버스에 유채 42×31 cm 국립현대미술관
그리고 이 작품 하나 더. 좋았던 작품 하나하나 다 코멘트하려면 너무 많아 무의미할 지경이나, 이 사랑스런 작품의 푸른빛이 너무 예뻐서 한참을 들여다 보았더랬다. 까치가 참 앙증맞기도 하여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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