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도 아니거늘,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늘어놓아도 하등 문제될 것 없을텐데, 무언가를 읽고 듣고 본 이후의 감상을 정제된 언어로 조목조목 표현하는 것은 늘 어렵거나, 부담스럽거나, 몹시 귀찮은 면이 있다. (하긴, 요즘엔 잡담 몇 줄도 적기가 쉽지 않지만.) 단 몇 줄이라도 기록해두는 게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이유로 아무런 기록없이 아스라히 떠나보내버린 감상들이 셀 수 없을 정도.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아, 이렇게 미리 방패치고 결코 정제되지 않은 글을 끄적끄적ㅡ
ㅁ 뮤지컬 햄릿
이 날의 시작은 뭐라 해도 남영동 [쭈꾸시]에서부터.
지난 주, 집에 가는 기차 안에서 숙대입구 맛집 소개 기사를 읽고는 가야겠다 적어둔 이자카야다. 공연 시작 시간 때문에 전투적으로 스피디하게 음식을 주문하고 먹어야 했는데, 나오는 음식마다 다 맛있더라. ㅠㅠ 바삭하게 튀긴 뜨거운 고로케, 담백하면서도 감칠맛나던 돼지고기 샤브샤브 샐러드, 윤기 좔좔 흐르던 장어구이, 달콤하기 그지 없던 천사새우, 쭉쭉 늘어지는 끈끈한 낫또, 야끼소바, 두부요리 등등에서부터 부드럽고 깔끔하게 넘어가던 구보다 센쥬까지, 어느 하나 나무랄데 없는 맛있는 먹거리. [지금 못먹으면 언제 먹으리] 정신으로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발휘하여 1시간 동안 수많은 접시를 비우고 자리를 나섰다.
홀짝홀짝 마실 때는 부드럽고 달콤하더니 몇잔 마셨다고 기분 좋게 알딸딸. 음주가 공연에 미칠 영향에 대해 슬쩍 근심하는 척 하며 씨어터 S로 향했다. 좌석 위치도 좋았거니와, 열간 경사도 어마어마하여 시선 확보 문제가 전혀 없었다. 무대 상층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냥 편안히 좌석에 기대어 누워서 보면 되었고.
그렇게 관람한 뮤지컬 [햄릿]은 놀라웁게도 여태껏 내가 보아온 어댑테이션 중 가장 재밌는 [햄릿]이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또한 재미없는 [햄릿]을 무대에서 보아왔던가. 그런데 이번엔 뮤지컬이라. 그래서 사실, 뮤지컬 자체에 대해선 아주 큰 기대 없이, 임태경의 노래를 직접 듣는다는 데에(물론 뮤지컬이니 노래가 전부는 아니지만) 더 큰 의미를 두고 왔는데, 이게 꽤 재밌더란 말씀. 'With enthusiastc audiences giving standing ovation after standing ovation, Hamlet as a musical suddenly seems like a perfectly sane idea.'라는 프라하 포스트의 리뷰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일단, 주연 배우의 훌륭한 가창력과 표현력,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배우의 발견, 은근히 귀에 감기는 멜로디도 좋았지만, 오로지 개인의 욕망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비극에 집중하는 [햄릿]이 굉장히 와닿았다. 사실 그게 바로 [햄릿]의 정수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문유님의 표현을 빌자면 '국가와 사변을 걷어낸 치정극'으로서의 이 원초적인 [햄릿]에 기대어 원전을 더욱 생생하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으니.
거트루드와 클라우디우스에게 각기 목소리를 심어줌으로써 완전한 치정극으로 거듭난 뮤지컬 [햄릿]의 주연 햄릿은 영웅이라기보단 격정적 사춘기를 겪는 소년 같은 캐릭터라, 주연 배우가 아예 어린 소년이라면 좀 더 그럴 듯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랬다면 임태경을 태경님으로 모시는 계기 따위도 없었을 터. 독 묻은 칼에 찔려 죽어가며 청초하면서도 슬피 '죽는 것, 사는 것' 하며 부른 [Be, Not Be(안식)]는 정말이지 다시 듣고 싶다. 그건 그렇고, 박은태 레어티스가 과잉 감정을 발산하긴 했지만, 이 뮤지컬 어댑테이션은 기본적으로 오필리어-레어티스 근친상간 요소를 깔고 가는 듯. 햄릿하고는 별로 절절치 않은 오필리어가 레어티스와는 미친 듯 절절하다는 게 어찌나 아이러니하던지. 어떤 관객은 대놓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레어티스가 무척이나 가련하더라'는 감상 후기를 쓰기도 했던데. 후후.
아, 역시 이번 공연 막내리기 전에 다시 한 번 임태경 햄릿으로 보고 싶다. 링거 투혼 말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는 태경 햄릿으로. (하지만, 커튼콜 때 남경읍씨가 말씀해주시기 전까지는 태경님이 펄펄 끓는 고열로 링거 맞고 누웠다가 관객과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무대로 달려온 줄은 까맣게 모르고, 엄청 열심히 스텝 맞추며 춤추는 모습에 조금 웃기도 했는걸. ㅠㅠ 그 몸으로 그런 무대가 어찌 가능하더란 말이냐.)
이 날 공연은 정신적으로 피폐한 요즘 내 일상에 한 줄기 햇살처럼 쏟아져 내려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내 삶을 충만하게 해 주고 있다. 그리하여, 연료 가득 채우고 현재 몹시 달리는 중. :-)
p.s. 브로드웨이 햄릿 넘버 중 공식 홈페이지( http://musicalhamlet.com )에 있는 몇 곡 잠시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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