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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맡의 책

위화, 허삼관 매혈기, 2006/04/02

갑작스레 <허삼관 매혈기>의 이 부분이 떠올랐다. 딸기언니가 책을 한 번 대폭적으로 처분했을 때 얻어온 위화의 소설인데, 무척 즐겁게 읽었더랬다. 어느 날 세나가 좁은 하숙방에서 하루 묵게 되었던 날, 나는 이 책을 펼쳐 다음에 옮겨 적은 부분에서부터 약 두세페이지 이전부터 시작해 이 부분까지를 세나에게 읽어주었는데, 읽었던 부분을 다시 읽는데도 목이 메여서 중간에 멈추고 침을 거듭 삼키고 있을 때 세나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지금 옆에 책이 있었다면, 발췌된 부분이 이해가 갈 수 있도록 훨씬 앞쪽에서부터 전체의 상황을 다 옮겨 적었을 테지만 인터넷 검색으로 찾을 수 있는 부분은 이 정도 뿐이라 다소 아쉽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전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멀건 옥수수죽으로 끼니를 때우다가 아껴둔 돈으로 가족과 함께 국수를 먹으러 갈 때 허삼관은 자기 친아들이 아니라고 일락이는 고구마를 먹게 하고는 부인과 다른 아이들과 함께 승리반점으로 향한다. 고구마 하나를 먹고 난 일락이는 너무 배가 고프고 서러워 가출을 한다. 일락이는 친아비 하소용을 찾아가보지만 냉대를 받고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 밤늦도록 일락이가 돌아오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은 척 끝까지 버티고 있던 허삼관은 결국 일락이를 찾아 나서고 울고 있는 큰아들을 발견한다.


"자, 업혀라."

허삼관은 일락이를 업고 동쪽을 향해 걸어갔다. 골목을 지나고 큰길을 걸어 강 근처로 갔다. 허삼관의 입은 그 와중에서 쉴 새 없이 일락이에게 욕을 퍼부었다.

"이 쪼그만 자식, 개 같은 자식, 밥통 같은 자식... 오늘 완전히 날 미쳐 죽게 만들어놓고는... 가고 싶으면 가, 이 자식아. 사람들이 보면 내가 널 업신여기고, 맨날 욕하고, 두들겨패고 그런 줄 알 거 아냐. 널 11년이나 키워줬는데, 난 고작 계부밖에는 안 되는 것 아니냐. 그 개 같은 놈의 하소용은 단돈 1원도 안 들이고 네 친아비인데 말이야. 나만큼 재수 옴 붙은 놈도 없을 거다. 내세에는 내 죽어도 네 아비 노릇은 안 할란다. 나중에는 네가 내 계부 노릇 좀 해라. 너 꼭 기다려라. 내세에는 내가 널 죽을 때까지 고생시킬 테니..."

일락이 눈에 승리반점의 환한 불빛이 들어오자 아주 조심스럽게 허삼관에게 물었다.

"아버지, 우리 지금 국수 먹으러 가는 거예요?"

허삼관은 갑자기 욕을 멈추고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그래."

중국의 공산주의를 일상에서 체험하는 오빠는 그것이 지긋지긋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말했었다. 거리 곳곳에서 일어나는 우스꽝스러운 인민재판 이야기를 늘어놓는 오빠의 재치 있는 입담에 까르르 웃었었지. 

하지만 <허삼관 매혈기>의 공산주의와 인민재판은 차마 웃어 넘길 수 없는, 마음 아파지는 역사의 산물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마음도 말랑해지지만 무엇보다 먹어본 적도 구경도 해 본 적이 없는 돼지간볶음에 뜨거운 황주가 간절해진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만약 나처럼 샘이 많은 사람이라면 '젊은 나이에 남의 입 속이나 들여다보고 사는 게 지겨워 치과의사를 집어치우고 작가가 되었다'는 책날개 속 저자 소개에 잠시 부아가 치밀 것이다. :)
comment [1]
060509  del
승리반점이었구나.. 영원히 '내 마음의 식당'으로 기억될 승리원이 생각나서 또 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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