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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맡의 책

피천득, 오월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 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득료애정통고 -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 실료애정통고 -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ㅡ피천득, 오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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