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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맡의 책

벽지, 2007/07/14

불현듯,

어린 시절 아끼고 아끼던 [아나스타샤의 비밀노트]의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어요. 

정든 집을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부모님께 탑이 있는 집이 아니라면 절대로 이사할 수 없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내건 아나스타샤에게
어느 날 부모님은 이사 갈 집을 보러 가자며 외출을 종용합니다.

마지 못해 따라 나선 아나스타샤는
차 뒷자리에서 말 한 마디 없이 퉁퉁 불어서는
절대로 절대로 이사는 가지 않겠다고, 새 집 따위는 필요 없다고 되새기며
부모님과의 전면전을 불사하겠다는 결의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도착해서 보니 
부모님이 점찍어 둔 집에 탑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지 않으려고 애를 써보아도 탑을 본 그 순간 
이미 아나스타샤는 그 집을 조금은 좋아하게 됩니다. 
부모님이 일층의 거실과 부엌을 돌아보는 동안 
아나스타샤는 아무 말도 없이 탑의 계단을 조르르 올라 그 끝의 다락방에 들어섭니다. 

전에는 누군가의 방이었을 그 곳에 선 아나스타샤는 기분이 묘해집니다. 
꼼꼼이 방을 둘러보다가 벽지가 조금 찢어진 부분을 발견하고는 손톱으로 살살 긁어 주욱 벗겨내자 
그 속에 또 한 겹, 그리고 그 안에 또 한 겹의 벽지가 나타납니다. 
세 겹의 벽지가 겹쳐 발라진 벽을 보며 아나스타샤는 그 방의 전 주인, 그리고 그 전의 주인들을 생각합니다.

살그머니 벽지를 뜯어보는 아나스타샤, 
그 아래로 또 그 아래로 등장하는 다른 색깔, 다른 무늬의 벽지, 
그 장면이 제겐 인상적인 시각적 심상으로 남아있다가 
이렇게 가끔 생각이 날 때가 있어요. 

p.s.
근데 정작 저는 여태껏 미국에서 벽지 바른 집은 본 기억이 없네요. 
다 페인트칠이던데.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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