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어린 시절 아끼고 아끼던 [아나스타샤의 비밀노트]의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어요.
정든 집을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부모님께 탑이 있는 집이 아니라면 절대로 이사할 수 없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내건 아나스타샤에게
어느 날 부모님은 이사 갈 집을 보러 가자며 외출을 종용합니다.
마지 못해 따라 나선 아나스타샤는
차 뒷자리에서 말 한 마디 없이 퉁퉁 불어서는
절대로 절대로 이사는 가지 않겠다고, 새 집 따위는 필요 없다고 되새기며
부모님과의 전면전을 불사하겠다는 결의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도착해서 보니
부모님이 점찍어 둔 집에 탑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지 않으려고 애를 써보아도 탑을 본 그 순간
이미 아나스타샤는 그 집을 조금은 좋아하게 됩니다.
부모님이 일층의 거실과 부엌을 돌아보는 동안
아나스타샤는 아무 말도 없이 탑의 계단을 조르르 올라 그 끝의 다락방에 들어섭니다.
전에는 누군가의 방이었을 그 곳에 선 아나스타샤는 기분이 묘해집니다.
꼼꼼이 방을 둘러보다가 벽지가 조금 찢어진 부분을 발견하고는 손톱으로 살살 긁어 주욱 벗겨내자
그 속에 또 한 겹, 그리고 그 안에 또 한 겹의 벽지가 나타납니다.
세 겹의 벽지가 겹쳐 발라진 벽을 보며 아나스타샤는 그 방의 전 주인, 그리고 그 전의 주인들을 생각합니다.
살그머니 벽지를 뜯어보는 아나스타샤,
그 아래로 또 그 아래로 등장하는 다른 색깔, 다른 무늬의 벽지,
그 장면이 제겐 인상적인 시각적 심상으로 남아있다가
이렇게 가끔 생각이 날 때가 있어요.
p.s.
근데 정작 저는 여태껏 미국에서 벽지 바른 집은 본 기억이 없네요.
다 페인트칠이던데. (웃음)
'머리맡의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7/01/15 (0) | 2014.07.12 |
---|---|
피천득, 오월 (0) | 2014.07.12 |
먹는 것이야말로 인생이다, 2009/07/12 (0) | 2014.07.12 |
회사 가기 싫은 이유, 2009/07/13 (0) | 2014.07.12 |
아작아작 씹어 삼키고픈 글, 2009/12/01 (0) | 2014.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