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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빌

앵글로색슨족의 <지킬앤하이드>, 2009/09/03

2009/8/29(토) 15:00 브래드 리틀-루시 몬더-벨린다 월스톤, 지킬앤하이드, 세종문화회관

(+ 다른 곳에 쓰기 시작한 후기를 옮겨 정리한 거라 존대 말투입니다;;;)

저의 뮤지컬 관람 인생에 있어 the point of no return을 짚어보라면 그건 아마도 <지킬 앤 하이드 2008-2009>가 무대에 올랐던 2008년 11월에서 2009년 2월까지의 기간일 거예요. 지칠 줄 모르던 반복 관람, 차마 닫힐 줄 모르던 지갑, 가족 같은 마음으로 긴장하고 또 자랑스러워 하며 사수하는 첫공과 막공, 뭐라 정의를 내려야 할 지 모르겠던 열병 같던 마음. 이전에도 이후로도 뮤지컬 매니아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지마는 pre-지킬 앤 하이드와 post-지킬 앤 하이드의 저의 뮤지컬 관극 패턴이나 태도는 지킬과 하이드, 또는 엠마와 루시간의 간극만큼이나 확연히 달라졌죠. 물론 그 중심에는 홍광호라는 배우가 뿌리처럼 단단히 박혀 있구요. 
이렇다 보니, <지킬 앤 하이드> 내한 공연을 놓칠 수야 없는 법이죠. 하지만 (홍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선뜻 큰 돈을 들이기는 부담스러워 3층 뒷편에서 만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앵글로색슨족의 <지킬 앤 하이드>를 만날 수 있었답니다.  천정에 붙어 볼지언정 단돈 만원에 앵글로색슨족의 <지킬앤하이드> 관람이라면 합리적인 지출이 아닌가요.

먼저 고백해야 할 것은, 사실 저는 <지킬 앤 하이드>라는 작품의 대단한 팬은 아니라는 거예요. LG 아트센터에서의 n번의 관람을 되풀이하면서도 저는 늘 제 자신에게 물어야 했습니다. 내가 이걸 왜 이렇게까지 보고 있나. 듬성듬성한 플롯에서 오는 불만족스러움, 마지막 결혼식 장면에 이르기 위해 그저 몰아치는 듯한 성급함을 느꼈던 적도 많았어요. 루시를 죽이고 그토록 괴로워하며 생사를 걸고 컨프론테이션을 하면서 지옥의 문 너머를 보았다는 지킬이 다음 장면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엠마와의 결혼식장에 들어서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요즘 말로다가 '뭥미?'스럽기도 하고, 그러다가 결국 제 손으로 죽고 마는 지킬이 허탈하기도 하고. 좀 더 솔직해보자면, 그렇기 때문인지 안타깝게도 이 작품(≠공연)에 진심으로 마음이 움직였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물고 뜯어도 <지킬 앤 하이드 2008-2009>는 제겐 너무나 특별한 공연이었죠. 기깔나게 훌륭한 넘버들로 엉성한 플롯을 대강 메우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에도, 볼 때마다 짠하고 가여웁던 루시, 상처 입은 짐승 같아 오히려 마음이 가던 하이드는 반복 관람의 동력이 되어 주었어요. 이렇다 저렇다 해도 이 공연은 자꾸 보게끔 하는 힘이 있었지요. 

<지킬 앤 하이드> 내한 공연을 보니, 이 작품이 어째서 흥행작이 아닌지 알 것 같았습니다. '오리지널'과는 또 다른 각색과 연출이 덧대어졌겠지만, 이 날 보았던 <지킬 앤 하이드>는 휴먼 드라마는 빠지고 SF(라고 해도 되려나;;;) 내지는 스릴러만 남은 인상이었거든요. 지킬은 선하지도 순수하지도 순진하지도 않았고, 하이드는 안쓰럽지도 동정심이 가지도 섹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지킬은 그냥 아집과 독선에 가득찬 연구자에 불과했고, 하이드는 이성이 제거된 악(惡)이랄까. 

공연이 나빴다는 말은 절대 아니에요. 전 오히려, 이 내한 공연이 원작이 구현하려던 모양에 더 가까운 게 아닌가 싶었지요. 관객들이 좀 더 납득할 수 있는 매끄럽고 분명한 흐름이었답니다. 다만 그게 별 매력이 없다는 게 문제였겠죠. 사실 <지킬 앤 하이드>의 치명적인 오류는 정신병=악이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양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전제부터가 공감이 안 간달까. 지킬은 정신병을 앓고 의식을 잃은 아버지를 계기로 선과 악을 분리하는 실험을 결심하게 되지요. 내한 공연에서는 성 주드 병원의 다른 환자들의 등장 없이 아버지와 지킬, 덴버스경만 등장하는 탓에 정신병이라는 증세가 부각되지 않는 편이지만, 아니, 의사라는 분이 정신병의 원인이 영혼을 잠식하는 악마 때문이라고 하면 어쩐단 말입니까;;;; 

내한 공연 앙상블의 균등한 가창력은 듣기에는 좋았지만, 머릿수는 많더라만 딱히 액센트가 없던 움직임과 안무는 보기에는 늘어지더라구요. < Facade >에서 브릿지 없이 무대에 섞여 등장하는 상류는 임팩트가 없었구요. 하지만, 이사회 장면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호명하며 스포트라이트 딱딱 비춰주던 성 주드 병원 이사들의 등장부터 이렇게까지 아수라장이 될 수 있구나 싶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던 지킬과 이사회의 팽팽한 대결까지. 같은 작품이지만 전혀 다른 작품을 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더군요. 하이드가 되기도 전에 이사들을 단번에 처리해버릴 것 같던 지킬의 포스라니. 게다가 어터슨이랑 어깨 맞대고 '저 뭣도 모르는 인간들. 내가 혼자 다 해 낼거야. 너네가 하지 말라고 내가 못할 줄 아냐, 낄낄낄' 하는 지킬이라니 ㅎㅎㅎ 아우, 너무 신선하잖아요. 여러 분들이 언급했던 것처럼 나이차가 거의 없이 동등한 위치의 친구 같던 어터슨도 참 좋았구요. 

(어쩔 수 없이 계속 비교 모드지만) 또 내한 공연에서 특히 맘에 들었던 건 약혼식 장면이었어요. 미니멀하고 어두운 느낌의 라이센스 무대의 무도회장에 비해 화려하고 생기발랄한 무도회장 느낌이 잘 살아서 좋았고, 지킬도 무대 왼쪽에서 등장하는 대신 주인공답게 한중간에서 인파를 가르며 걸어 나오는 게 좋았구요. 지킬과 엠마의 듀엣인 < Take Me As I Am >이 나오기 직전까지 거침없는 왈츠를 추거나 담소를 나누며 무대 곳곳을 채우는 인파가 약혼식장에 잘 어울려서 좋았지요. 하지만, 이 모든 게 < Take Me As I Am >이 시작되기 직전까지였답니다;;; 엠마 목소리가 예뻐서 기대했는데 이 분은 솔로에는 괜찮은데 듀엣이나 앙상블에서는 목소리가 너무 튀어요. 일견 좀 뻔하고 심심한 듯 해도 제대로 부르면 진짜 사람 마음 쿵 내려 앉게 만드는 < Take Me As I Am >을 기대했는데, 헛된 기대였습니다 ㅠㅠ < Take Me As I Am >에서 엠마 목소리가 듣기 싫으면 어쩌라구요.... 

헌데, 더 싫었던 건 루시의 노래였습니다;;;; 1막의 루시는 정말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노래를 못하는 건 아닌데, 못해!' 싶던 루시였어요. 2막에서는 제 실력을 찾은 건가 싶게 썩 괜찮았는데, 1막에서는 내내 거슬리는 플랫과 조절 안 되던 호흡, 그저 첫박에만 강박으로 밀고 나오며 노래만 어떻게든 겨우겨우 불러내는 모습이 너무 실망스러웠거든요. 도대체 < Bring On The Men >에서 왜 지킬이 혹하는지 모르겠을 정도였다면 설명이 될까요. 내한 공연의 루시 역시 라이센스 공연의 루시와는 캐릭터가 매우 달랐습니다. 소녀같이 순수하고 당돌한 구석이 있었던 우리 루시들과는 달리 천한 창녀 루시였어요. 이 역시 원작에 가까운 루시가 아닐까 싶었지만 역시나 우리 루시들이 그리워지더라구요. 지킬/하이드도 이렇고 루시도 이렇다 보니, 하이드가 정말 루시를 사랑했던 것 같은 느낌은 죄 사라지고, 그야말로 욕정덩어리 하이드만 남더라는...;;;;

진짜 놀랐던 건 < Alive 1 >을 마치고 스토커처럼 루시를 쫓아가서 '늘 너를 지켜보고 있다! 으아아아웨웨웨웩' 하는 하이드의 난폭함에 대뜸 < It's A Dangerous Game >의 첫 소절을 부르는 루시라니... 설마 여기서 덴져러스 게임이 시작되는가 싶어 완전 패닉했었는데, 다행히도 한 소절만 끼어들더니 다시 하이드 넘버로 넘어가더군요. 이거 원 SM도 아니고, 어떻게 거기에서 루시가 덴져러스 게임을 부를 수 있을까 싶어 정말이지 너무나 충격적인 연출이었어요...

덴져러스 게임 얘기가 나와서 바로 그리 넘어가면, 서로의 몸에 그닥 손 대지 않고 소화해내는 이 넘버도 꽤 괜찮았어요. 후반으로 가면 하이드와 루시가 왈츠를 추는 듯한 안무도 신선하더라구요. (그렇대두 저는 라이센스 덴져러스 게임의 절대적 추종자;;;;) 이쯤 되니 감상 포인트는 라이센스와 내한 공연, 뭐가 뭐가 다른가를 살펴보는 형국이 되어버렸지만, 사실 그 차이를 계속 찾아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던 거지요. < In His Eyes > 클라이막스 대목에서 갑자기 손을 맞잡는 엠마와 루시도 웃겼지만, 서로를 경계하며 빙글빙글 돌다가 퇴장하는 그녀들은 더더욱 재밌었답니다. 정말이지 같지만 딴판인 작품을 보는 것 같았어요. 

역시 긴박함과 살벌함은 떨어지지만 < Murder, Murder >의 후렴구에서의 앙상블과 오케스트라 연주의 경쾌한(?) 엇박은 꽤나 마음에 들었고, < Once Upon A Dream >의 마지막 소절을 엠마가 지킬을 등지고 부르는 대신 연구실 계단을 올라가 지킬 쪽을 바라보며 마무리 짓는 것도 좋았고, 지킬/하이드의 브래드 리틀도 참 능숙하다 싶었고, 새로운 배우, 새로운 구성, 새로운 무대로 접할 수 있었던 여러 모로 볼만한 재밌는 공연이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센스 공연을, 홍광호의 지킬/하이드를 그립게 하는 공연이기도 했지요. 볼만큼 봤다고 생각했는데도 2008-2009년의 <지킬 앤 하이드>를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내용에는 몰입이 어려워도 캐릭터에는 몰입할 수 있었던, 마구 몰아치는 것 같았지만 템포와 액센트가 느껴졌던 그 공연을요. 조명 하나에만 기대어 표현해내던 <지킬 앤 하이드>의 클라이막스인 < Confrontation >도 다시 보고 싶었고, 죽으면서 어터슨의 어깨를 툭툭 치던 지킬의 손길도 다시 보고 싶었어요. 

지나간 공연은 되돌아 오지 않겠지요. 내한 공연을 통해 이제서야 나의 <지킬 앤 하이드>를 총정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젠 정말 편히 쉬세요....가 아니라 다시 돌아올 때까지 안녕, 입니다. :-)

p.s. 

# 루시가 그네 타고 등장한대서 기대했는데, 영 기대에 못 미쳤고, 그 그네가 다시 한 번 등장해서 레드렛에서 < A New Life >를 부르는 루시를 침대 위로 이동시켜주는 대목에선 경악을 금치 못했슴다;;;; 

# 약혼식부터 결혼식까지가 인생에서 제일 긴 시간일 거라고 징징대던 지킬씨 보시오. 어터슨 끌고 총각파티 해야 한다고, 어쩌면 여기서 내 실험에 참여할 지원자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레드랫 가는 당신 뭐요;;;;

# 제대로 불꽃 튀던 지킬과 덴버스경. 지킬의 캐릭터는 정말이지 분명하더군요.

# 네, 여러 모로 재미있던 내한 공연이었어요~ ㅎㅎ
comment [5]
은미
090904  del
소리의 명확하고 깔끔한 정리~! GOOD~!!
은진
090904  del
카페에서도 정리 잘 했다고 난리던데! 역시 소리!^^b 
읽으면서 같이 작품 본 듯한 느낌이 든다!! 
바쁜 와중에 정리한 소리 토닥토닥~~^^ 
부업으로 평론가 해보면 어때?^^ 
많은 사람이 소리의 글을 반길 것 같은데~
소리
090904  del
은미/ 사실 구구절절 얘기하고픈 건 더 많았는데 그러다간 밤새 써야겠더라고;;;;; 이후 지킬 앤 하이드 내한공연에 대한 평을 보니 우리가 프리뷰 때 3층에서 빨리 보길 잘했다 싶어.... 립씽크라니 이게 뭔 소리야 -ㅁ-;; 

은진/ 헉, 은진아. 딱 한 분이 정리 깔끔하다고 그랬을 뿐 아무 난리는 없던데 ㅎㅎㅎ 네 생각하며 후기 쓰기 시작했단다. 함께 지킬 앤 하이드를 본 너와 이 공연을 보고 같이 씹어줬음 재밌었을텐데 말야! 부업으로 평론할 수 있는 수준이면 진작에 했겠지만... 그냥 너처럼 즐겁게 읽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전혀 날카롭지도 꿰뚫는 것도 없는 비루한 잠담성 후기라도 열심히 쓰겠소!
퍼플
090907  del
나 이 리뷰보면서 '늘 너를 지켜보고 있다! 으아아아웨웨웨웩' 요 부분서 딱~ 소리표 글솜씨라며 대박 웃었던 기억. ㅋㅋㅋ 
비교하는 재미는 있었지만 감동은 없었던 지킬과 하이드씨였어. -.-
소리
090907  del
퍼플/ 자동 음성지원 되지요? ㅎㅎㅎ 암튼 그 장면에서 완전 기겁했었어요... 그냥 저렴하게 보기에 재밌었어요. 10만원 넘게 주고 보면 정말 돈 아까울 것 같아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