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30(목) 20:00 김무열-조정석-김유영, 스프링 어웨이크닝,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http://www.umass.edu/rso/guild/spring%20awakening.jpg)
묵직했다.
일세와 마르타의 어두움이, 모리츠의 무거움이, 벤들라의 죽음이, 멜키어의 혼돈이, 깨어난 청춘의 무게가 묵직하게 밀려와 공연장을 나서는 마음에 여운이 남았다.
놀라웠다.
19세기 독일에서 쓰여진 희곡이 구현하는 동시대성이. 삶의 어떤 부분들은 결코 변칠 않는다.
어떤 형태 또는 방식으로든 사춘기를 살아낸 '생존자'들이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이토록 격정적이고 이토록 혼돈에 가득찬 사춘기를 고요히 지켜보고 있다는 점도 어떤 의미에서는 놀라웠다. 그렇게 자위, 미성년 혼전 성관계, 근친강간, 동성애, 낙태, 자살이라는 엄청난 이야기들이 무대 위에서 하나둘 펼쳐지고 있었다.
[스프링 어웨이크닝 Spring Awakening]의 넘버들은 극적 맥락을 빌지 않고도 워낙 듣기 좋은 음악이라 2007년 ㅁㅇ님께 음원을 얻은 이후로 수시로 들어왔었다. 특히 지난 겨울 남산을 오르내리는 버스 안에서 [스프링 어웨이크닝] OST를 얼마나 들었던가. 어느 멜로디, 어느 가사 한 토막이 겨울밤 검고 차가운 공기처럼 유난히 마음을 파고 들기도 했는데.
2009년 7월, 그렇게 '노래'로만 들어왔던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실제 무대로 접한다는 기대감을 안고 공연장을 찾았다. 프레스콜 사진을 통해 먼저 보았었지만, 무대가 어찌나 아기자기 발랄하고 예쁘던지. 붉은 벽돌이 켜켜히 쌓인 벽. 뮤지컬 넘버가 순서대로 적힌 칠판. 작품과 연관된 에피소드를 박제해둔 듯한 액자들. 너무 예뻐서 홀딱 반할만한 이런 무대에서 그토록 암울한 이야기들이 차례차례 펼쳐지는 아이러니라니. 벽에 설치된 빨강, 파랑 불빛의 전구, 네온바의 현대적 조명은 19세기 독일 청교도 사회라는 무대 배경을 멋지게 배반하고, 배우들과 함께 무대 위에 오른 밴드와 관객석, 그리고 무대 위 관객석을 넘나드는 배우와 싱어들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때로는 타자화하고, 때로는 사회화하는 효과를 냈다.
이런 형식적 파격은 극에 대한 완전한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히려 흥미를 느끼게 하는 요인이 되었는데, 특히 재밌었던 건 난데없는 핸드 마이크, 스탠딩 마이크의 활용이었다.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 궁금해하는 벤들라에게 엄마가 여자가 남자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면 된다는 모호한 대답만 남기고 회피하자, 강한 비트와 함께 시작되는 Mama Who Bore Me(Reprise)를 여자아이들이 핸드 마이크를 꺼내 부르던 순간의 전율이란. 품속에서 꺼내거나 다른 배우가 들고 와서 천연스레 척척 나눠주는 걸 받아들어 핸드 마이크를 통해 부르는 노래들은 대체로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집단 방백으로 활용된다. 핸드 마이크가 숨겨진 욕망, 분노, 호기심 등의 감정을 말그대로 '품속에서 꺼내' 말하도록 하는 기제가 되어주는 것.
작품은 굉장히 매끄러웠다. 넘버는 말할 것도 없이 좋고, 혼성 중창이 빚어내는 화음도 아름다웠으며, 번역도 꽤 좋아서 멈추어 읊조리게 되는 가사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The Guilty Ones의 ‘And now our bodies are the guilty ones'는 ‘한 점의 죄의 옷을 입은 몸’으로 번역되었는데, 원곡에서는 다소 건조하게 느껴지는 가사를 국문으로 옮겨오면서 운율과 감각을 살려냈다. The Mirror-Blue Night의 'It's broken inside, I'm a man and a child'는 '이젠 어른도 아이도 아닌 몸'으로 번역되었는데, ‘어른이자 아이’라는 원곡의 가사를 ‘어른도 아이도 아니라’는 전혀 반대의 표현으로 옮겨오면서도 원래 의미를 훼손하기는커녕 더욱 절묘하게 살려내고 있다. 김무열은 하이틴 드라마의 매끈한 엘리트 모범생 같은 이미지와 썩 어울렸고, 종종 열심히 연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긴 하지만 김유영은 훌륭한 데뷔를 한 것 같았고, 조정석의 신경쇠약적인 모리츠는 꽤 매력적이었다.
1막에 비해 2막이 좀 느슨하고 서둘러 맺는 듯한 인상이고, 그로 인해 극중 내내 일관되게 억압적이고 폭력적이며 자의적이고 무자비한 어른들과의 화해(The Song Of Purple Summer)가 급작스럽게 이루어지는 듯 했지만ㅡ‘자줏빛 여름’인만큼 그것이 온전한 화해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더라도 말이다ㅡ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어서 이 정도 음악, 안무, 연기, 무대를 보여주는 새로운 작품이라니 매우 흡족하지 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몰입할 수 없었던 까닭은, 나였더라도 낙제한 모리츠가 미국으로 도망갈 수 있도록 천 달러를 빌려주거나, 임신한 십대 딸아이가 아이를 낳고 살아가도록 선뜻 지지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어른도 아이도 아닌 그 시기를 이미 내가 살아 넘겼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온전히 내 이야기이면서 내 이야기가 아니게 되어버린다.
원작이 쓰여진 당시에나 지금에나 파격적인 주제를 파격적인 형식으로 무대 위에서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 작품에 대한 평이 극과 극이란다. 1막만 보고 공연장을 나가는 관객들도 있었다고. 무겁고 어둡고 심란하지만, 못지 않게 매력적인 이 작품을 내가 앞으로 몇 번이나 보게 될 지, 굳이 세지 않기로 했다. ;-)
+ 잡담성 공연 단상
1. The Word Of Your Body 에서 약간 몽환적인 느낌으로 반복되는 '오ㅡ'를 라이센스 버전에서는 멜키어와 벤들라가 '오우!'에 가깝게 불러서 우습더라. 그렇게 안 불렀음 좋겠는데.
2. 중간중간 웃음을 자아내는 포인트가 충분한 극인데, 굳이 동성애를 코믹하게 그려낼(The Word Of Your Body(Reprise)) 필요가 있었을까? 동성애를 희화화하는 게 거북스럽다.
3. 대체적으로 번역이 훌륭한데, Totally Fucked의 You're fucked를 '좆까'로 번역한 건 어폐가 있달까. ㄱㅅ님 말처럼 '좆까' 보다는 '좆됐다'에 가깝잖아. 번역이란 참 어렵지 뭔가. (욕설이 난무하는 포스팅, 왠지 즐거운데?;;;; 이런 욕 첨 써본다;;; 가사예요, 가사 ㅎㅎ)
4. 머리와 가슴과 배를 쓰다듬고 팔을 뒤로 빼고 몸을 살짝 제끼는 안무. Mama Who Bore Me 나 The Mirror-Blue Night 에서는 꽤 분위기 나는데, Totally Fucked 에서 군무(?)로 정신없이 활용될 때는 좀 많이 웃기더라. 뭐랄까 의미를 알 수 없는 난잡한 움직임 같아 보여서, 이건 좀 더 두고 봐야겠다. ㅎㅎ
5. 제일 끔찍했던 건 마르타와 일세의 The Dark I Know Well... 아, 눈물 나도록 끔찍하고 소름끼치고 잔혹하다. 말없이 그냥 보기만 하고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않는 엄마.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어른들은 엄마조차 그런 존재이다.
6. 임신한 벤들라를 다그치는 엄마. 자신이 어떻게 임신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성에 무지한 벤들라. 저기서 때리면 최악이다 싶은 타이밍에 여지없이 벤들라의 뺨을 찰싹.
7. 프로그램을 뒤적거리지 않으면 이름조차 기억하기 힘든 단역이어도 한 사람 한 사람 개성있게 표현된 아이들에 비해 어른 역을 맡은 배우는 단 두 사람뿐. 이 두 남녀 배우가 의상도 갈아입지 않은 채 학교 선생님이 되었다가, 피아노 선생님이 되었다가, 벤들라의 엄마가 되었다가, 마르타의 엄마가 되었다가, 일세의 아빠가 되었다가, 모리츠의 아빠가 되었다가, 멜키어의 부모가 되었다가, 의사가 되었다가, 불법 낙태 시술사가 되었다가 한다. 어른들의 몰개성화. 어른들에 대한 이 작품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랄까.
8. 마지막 넘버인 The Song Of Purple Summer 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어른들과 아이들 전원이 한데 모여 부르는 Totally Fucked 에서조차 온몸으로 절규하는 아이들에 반해 야비하고 섬뜩한 느낌으로 조소하는 듯한 두 어른들의 표정이란.
9. 벤들라 역의 김유영은 종종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있다는 느낌을 자아내는데, 먼 곳을 응시하거나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지을 때 눈에 힘을 살짝만 빼줘도 좋겠다는 느낌. 몽환적인 느낌이어야 할 부분에서 너무 뚫어지게 응시해서 사시로 보이는 역효과가 난다.
+ 재밌게 읽은 기사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1002&article_id=57190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1002&article_id=571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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