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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빌

밀린 공연 메모, 2009/07/08

밀린 걸로 치면 지난 겨울에 내 혼을 쏙 빼놓았던 <지킬앤하이드>로 되짚어 올라가야 하겠지만ㅡ아직도 n번의 관람에 대한 총정리를 하지 못했다. 어쩜 평생 하지 못할 것이다ㅡ가방이랑 지갑이랑 방구석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티켓을 모으다가, 이렇게라도 몇자 끄적이지 않으면 결코 적지 못하겠다 싶어 최근 관람 공연에 대한 짤막 메모. 개중엔 좌정하고 차분하게 감상을 적고 싶은 공연도 있지만, 여전히 나는 출력 불가 상태이다. 

09/5/22(금) 20:00 이정미-이창용, 내 마음의 풍금, 호암아트홀

학창 시절, 선생님 한 번 좋아한 적도 없는 주제에 홍연이의 마음이 내 마음인 양, 눈물이 다 났다. 가 닿을 곳이 없는, 되돌려 받을 수도 없는, 그 마음을 어찌 모르리. 좋아하는 선생님이 짝사랑하는 여인에게 차마 전하지 못한 백합다발을 챙겨다가 제가 꽂은 산수유꽃을 뽑아내고 화병에 바꿔 꽂는 홍연의 사려 깊음은 얼마나 마음 아픈가. 

조명이 과하다 싶은 느낌도 있었지만, 무대가 무척 아름다웠고, 뮤지컬 넘버들도 굉장히 좋아서 이후 한참 동안 <내 마음의 풍금> OST를 끼고 살았다. 아니, 이렇게 훌륭한 공연인 줄 알았으면 작년에 진작 챙겨볼 걸, 오만석씨고 조정석씨고 간에 포스터 보니 내 취향 아니다 싶어 무심히 넘겨버렸지 뭔가. 뮤지컬 대상 시상식에서 왜 그리 상을 줄줄이 탔는지 비로소 이해하였다. 정작 시상식장에서는 몰아주기 아니냐고 삐죽댔었는데. 
호암 아트홀 2층 1열은 난간 때문에 시야 장애가 있어 영 안 되겠더라. 뒤에 사람이 없어 허리를 폈다 숙였다 자세 조정이 가능했지만, 어느 공연장이고 2층일 경우 1열은 늘 난간 때문에 시야 장애가 있는 편. 게다가 1열 중간이라 조명기랑 일직선이라 공연 내내 주변이 환했더라는;;;



09/5/27(수) 20:00 엔니오 모리꼬네 시네마 콘체르토 Part II,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평일에 올림픽공원까지 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체득할 수 있었던 날. 경험치 획득이랄까. 영화음악으로서의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을 무척 좋아하지만, 연주회 음악으로 접한 것은 처음. 회사에서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이다 헐레벌떡 공연장에 도착했던지라, 공연 시작 전에 일행에게 졸 수도 있으니 부끄러워 말라고 미리 말해두었는데, 정말 1막 중간에 살짝 졸았다. audience-friendly한 레퍼토리는 아니라는 생각도 슬쩍 들었더랬다. 살짝 졸고 나서 정신 차리고 나머지는 집중해서 잘 들었는데, 체조경기장이라는 곳에서 연주회는 정말 못할 짓이더라. 내내 여기가 LG아트센터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으니. 그럼에도 엔니오 모리꼬네여서 좋았지. 다만, 인터미션에 간식 먹는 관객들에게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서 착석하라'고 훈계하는 안내요원도 만나는 등 이 날의 경험치는 상당했던 기억;;



09/6/5(금) 20:00 마라, 사드(Marat, Sade),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프랑스 혁명에 대한 이야기라는 정보만 들고 갔다. 이런저런 호평에도 불구, '너무 심오하려고 하면 오히려 감흥이 깨지기 마련'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무슨 얘길 하려는지 알겠어, 하지만 이런 식으론 별 감흥을 얻을 수 없는 걸.' 싶었달까. 일행의 감상도 마찬가지여서, 괜히 끌고 가서 돈 쓰게 만든 게 아닌가 잠시 자책하였다. 급기야 나는 "내가 혁명에 대해 얘기할 동안 나를 채찍질하라"며 웃통을 벗어던지고는 샤를로뜨에게 채찍을 건네주던 사드 후작 장면에서는 졸고 말았는데, 비몽사몽간에도 저렇게 맞다니 꽤 아프겠군 싶었을 뿐;; '거리 두기' 장치로서의 나레이터라지만, 명확하기 그지 없는 주제를 관객들에게 일일이 떠먹여주는 듯한 존재로 느껴져서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관객 모두를 성급히 2009년으로 끌고 와버리는 제일 마지막 나레이터의 한 마디도 동일한 맥락에서 매우 김이 샜더랬지. "2009년 6월 5일, 여러분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라는 시시한 엔딩이라니. (네, 저는 세종M씨어터 2층 1열 중앙에 앉아서 대체 왜 그런 질문으로 이 극에 사족을 다는 걸까 생각 중이죠~)

학교에서 감상문 쓰기 과제를 받아왔는지 학생들이 많이 보이던데, 어린 학생들에겐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좋은 작품이었을 것 같다. 나도 10년 쯤 전에 봤다면 감동했겠지. 뭐, 퀄리티로만 보면 사실 나쁘지 않은 연극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임문희씨도 반가웠고. 어째 이 분은 그새 노래가 더 는 것 같아. 



09/6/7(일) 18:30 홍광호-쏘냐-임혜영, 지킬앤하이드,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

어.. 그게 그러니까 또 지킬앤하이드;; 그만큼 봤으면 됐지 또냐 싶지만, 단돈 9천원에 08-09년 지킬앤하이드에 미련 없이 마침표를 찍어주겠다는 심정으로 머나먼 일산까지 다녀왔다. 정말 멀었다. 그래서 공연장에 도착했을 즈음엔 너무 지쳐서 공연이고 뭐고, 이걸 또 봐야 할 생각에 진저리가 날 지경이었다. 공연장 마당에서 피크닉 하며 노닥거리다보니 기분 전환이 되었고, 막상 공연장 들어가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결론적으론 오랜만에 보니 더욱 볼만했다. 좋았다. 역시 팔리는 뮤지컬엔 다 이유가 있는 법. 광호군의 지킬은 달라져 있었다. 연구에 몰두한 nerd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조금은 지쳐 있는 데다가 자신의 연구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환멸감을 느끼는 귀족 청년의 아우라가 덧입혀졌더라. 나쁘지 않은 변화라고 생각했고, 상큼한 기분으로 공연장을 나섰다. 

이제 정말 당분간 <지킬앤하이든>는 쫑이다! 시원하다! 는 기분으로 가벼이 돌아설 수 있었던 건 아마도 내가 이 작품에 진심으로 마음이 움직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 마음을 그대로 스캔한 듯 절묘하다 싶었던 무미건조님의 글처럼 "지킬의 치열한 인생, 루시의 고독한 절망, 엠마의 의연한 사랑 이런거 거기 있겠구나 생각은 했어도 진심으로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던(blog.naver.com/wetwired/140063612161)" 것이다.

비슷한 선상에서 당최 하이드를 손톱만큼이나 알까 싶건만 "당신은 절대로 날 해치지 않는다"며 의기양양한 엠마가 얄밉고, 루시 죽여 놓고 생사를 걸고 컨프론테이션까지 하고 났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게 웃으며 엠마와의 결혼식장에 들어섰다가 제 손으로 죽고 마는 지킬도 어이 없는 구석이 있지만, 그래도 볼 때마다 마음이 짠하고 가여운 생각이 드는 루시, 상처 입은 짐승 같아 오히려 마음이 가던 하이드가 있어 그 겨울밤을 그토록 가열차게 났겠지. 

이러니 저러니 물고 뜯어도 나는 08-09년 지킬앤하이드를 절대 잊을 수는 없을 거다. 



09/6/14(일) 14:00 홍광호-곽선영-서나영, 빨래, 두산아트센터

"별로 안 봤어요~" 해놓고 보니 총 여섯번을 봤더라;;; 6/14일을 막공으로 09년 연강홀에서의 빨래에 마침표를 찍다. 연강홀 빨래에 대해서는 꼭 정식으로 글을 쓰겠다 다짐했는데, 아무래도 7월말부터 학전그린에서 시작되는 빨래까지 보고 나야 글을 쓸 정신이 차려지려나. 프리뷰 첫공 보고 나서 추스리기 어려웠던 마음을 떠올려보면, 역시 빨래는 빨래다 싶도록 연출, 스탭, 배우들이 이루어낸 쾌거가 놀랍다. 좋은 작품의 저력은 이런 것일 거다. 

빨래를 보고 나면, 나도 친하게 지낼 사람들이 곁에 필요하다는 걸 다시금 느끼곤 하였다. 나의 부채의식이 어김없이 자극되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게 되었다. 이 작품의 결말을 현실적으로는 해피엔딩이라 하기 어렵다 해도, '너와 내가 우리 된 것'이 행복이 아니라면 무얼까. 

comment [5]
진희 :)
090709  del
'너와 내가 우리 된 것'이 행복이라는 언니의 말, 완전 공감!!! 
그런데 점점, 그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 왜 이리도 눈치보이고 어려운지요. 히힛, 자꾸 소심해지는 듯 해요. 어른이 되어가면서.
은미
090709  del
소리 메모보면서 목록 중 내가 봤던 공연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보게 되는 걸...^^ 
이번 풍금은 지난시즌보다 홍연이의 감정이 더 도드라지게 표현되어서 그런지 짝사랑 같은 거 해본 적 없는 나도 그 감정에 더 이입되어서 저릿저릿해가며 봤어. //지킬도...홍광호씨의 빨래도 이젠 안녕~!(소리..학전에서의 빨래 함께 하자구~!!!)
소리
090710  del
진희/ 하이, 진희~ 오랜만 ^^ 잘 지내지? 덕수궁 미술관에서 하는 보테로전이 재밌다던데, 교사들은 3천원이나 할인되어서 7천원이면 보더라~ 9월까지니까 챙겨 보려무나. ㅎㅎ 나는 만원 내고 보러가야겠지? 

은미/ 저 중에 빨래랑 지킬앤하이드는 언니랑 같이 본 거였네. ^^ 글을 쓴다는 건 엄청난 에너지를 요하는 것 같아. 내가 노래 잘 하는 사람이랑 글 잘 쓰는 사람한테 홀랑홀랑 반하는 이유가, 그 에너지와 재능 등등에 대한 선망인 듯. ㅎㅎ 

그나저나, 홍광호씨라니 ㅋㅋ 갑자기 너무 깍듯한 걸. 홍광호씨는 잘 지내고 계시겠지 ㅋㅋㅋ 학전 빨래 날을 잡아보아요~ 박정표씨, 정문성씨 모두 궁금하닷 *_* 그리고 난 최보광씨의 나영 안 봤으니까 최보광씨도 ^^
090713  del
켜ㅑ... 많이도 봤구나. 게다가 또 한편당 여러번을 봤을테니.ㅋㅋㅋ 
빨래 아직도 해??
소리
090713  del
나리/ 내가 모든 공연을 여러 번 보는 건 아냐. ^^ 홍광호군이 출연하는 빨래의 막은 내린지 이미 오래지만, 빨래는 7월말부터 다시 대학로에서 시작하니까, http://ticket.interpark.com 에 가서 검색해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