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The Guernsey Literary and Potato Peel Pie Society]을 다 읽은 다음 날 뮤지컬 [영웅]을 보고 났더니, 의도치 않게 전쟁과 함께 한 주말이 되고 말았다. 두 작품이 묘사하는 전쟁의 시공간과 전쟁을 조명하는 방식은 사뭇 달랐지만, 두 작품 모두 '전쟁'이라는 사건이 인간에게 일으키는 균열, 파괴, 절망, 그리고 용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맞닿는 지점이 있었다.
전자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의 해협 제도(Channel Islands)에서 전쟁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고, 후자는 일제강점기 직전의 대한제국에서 전쟁에 맞서는 독립투사의 이야기다. 전쟁이라는 동일한 소재를 다루되, 전자는 전시에 몰래 숨겨둔 돼지를 구워먹고 난 귀갓길에 독일군의 통금에 걸려 거짓변명으로 탄생한 문학회를 구심점으로 삼고 있는 만큼 전쟁의 비통함을 이야기하면서도 소품같이 재기발랄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작품 전면에 흐르는 반면, 후자는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결성한 단지동맹(斷指同盟)과 안중근 의사를 이야기의 축으로 하는 만큼 시종일관 비장하다. 이렇다 보니, 이 둘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같지만, 작품을 관통하는 '전쟁'이라는 동일 소재만으로 퍽이나 다른 분위기의 두 작품이 이렇게 나란히 놓인다.
#1.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건지...]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으며 읽은 행복하고 따뜻한 책이었다. "Treat yourself to this book, pleaseㅡI can't recommend it highly enough."라는 표지의 추천사가 완벽하게 설명해주듯, 달콤한 휴식 또는 선물 같은 책이라고 해야 할까.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작품 속에 언급되는 수많은 다른 책(찰스 램, 찰스 디킨스, 셰익스피어, 세네카, 브론테 자매, 제인 오스틴, 오스카 와일드, 아가사 크리스티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을 당장 집어들고 싶게 만드는 매력적인 책이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군 점령에서 벗어난 해협 제도의 건지섬에서 런던으로, 작품의 1인칭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줄리엣에게 편지가 한 통 날아든다.
친애하는 애쉬톤 양께,
제 이름은 도시 애덤스라고 합니다. 저는 건지섬의 성 마틴 교구의 농장에서 살고 있어요. 한때는 당신 소유였던 찰스 램의 [엘리아 수필 선집]을 제가 가지게 되는 바람에 당신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책 표지 안쪽에 당신의 이름과 주소가 쓰여있었거든요.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찰스 램을 무척 좋아합니다. 제 책은 [선집]이라고 되어 있어서, 혹시 찰스 램이 다른 작품을 더 쓴 게 아닌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 작품들을 읽고 싶은데, 독일군이 떠나긴 했어도 아직도 건지섬에는 서점이 하나도 남아있질 않거든요.
혹시 제게 친절을 베풀어주실 수 있을까요? 런던에 있는 서점의 이름과 주소를 제게 보내주실 수 있으세요? 저는 찰스 램의 작품을 우편으로 주문해서 읽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이 찰스 램의 생애에 대해서 쓴 적은 없는지, 그렇다면 그 책을 구할 수 있을지도 알아보고 싶습니다. 그의 비상하고도 변화무쌍한 정신으로 미루어보건대, 찰스 램은 엄청난 인생의 비애를 겪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찰스 램은 독일점령기 동안 저를 웃게 해주었지요. 특히 그가 돼지 구이에 대해 쓴 부분이요.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은 우리가 독일군으로부터 숨기려고 했던 돼지 구이로부터 시작되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찰스 램에게 친근감을 느낍니다... (후략) 편지글로 이루어진 책이라는 정보 없이 처음으로 [건지...]를 펼쳤을 땐, 약간의 실망감도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뭐든지 우걱우걱 읽어해치우고 싶었던 요즘의 마음은 유려하고도 섬세한 필치에서 길 잃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가벼운 구어체에 가까운 편지글 모음이라니... 편지글로 이루어진 작품이라는 점에서 헬레이네 한프의 [채링 크로스 84번지]나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허나, 웬걸... 실망감이 무색하게 이 멋진 책에 얼마나 빠져들었느냔 말이다. 편지글의 묘미라는 게 무어냐. 글쓴이의 마음을 그대로 알 수 있다는 것 아니던가. 그리하여 1인칭 주인공에 빗댈 수 있는 줄리엣, 줄리엣의 편집자 시드니, 줄리엣의 친구 소피, 줄리엣의 추종자 마크, 출판사 직원 수잔, 건지섬의 도시 애덤스, 건지섬 문학회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의 다른 멤버들인 아멜리아, 이솔라, 이벤, 엘리 등등 수많은 인물들이 서로서로에게 쓴 편지들이 각 인물들의 캐릭터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어가는 묘미가 대단했다. [채링 크로스 84번지]가 대체로 두 사람의 서신 왕래에 집중하고 있는 점과 [키다리 아저씨]가 답신 한 줄 없이 혼자 쓴 편지로만 이루어졌다는 점과 비교했을 때, [건지...]는 줄리엣을 중심으로 수많은 인물들을 응집시키면서도 각각을 생동감 있게 살려내, 과연 이런 이야기를 편지글로만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던 우려를 오히려 재치있게 해소해주더라.
#2. 영웅
제목마저 노골적으로 비장한 [영웅]. 이토록 찬사 일색인 작품이라니 나는 단돈 만원에 프리뷰를 볼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게 약이 올라 죽을 지경이었다. 배우, 앙상블, 무대, 안무, 작품, 하나같이 호평이었다. 정성화씨가 이 작품으로 남우주연상을 타야 마땅하다는 평가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궁금증의 진폭이 날로 더해가던 중, 결국 급히 정성화 캐스트로 예매하여 전체적인 무대를 보기에 적합하다는 2층에 올랐다. 아, 참말로 오랜만인 LG 아트센터.
오히려 실망하게 될 지도 모르니 너무 기대는 말아야겠다 생각했지만, 입을 모은 칭찬에 내심 기대가 되긴 됐었나보다. 여러 면에서 훌륭했지만, 아쉽게도 기대만큼 내게 와 닿는 작품은 아니었던 것.
이 날의 캐스팅은 정성화/조승룡/김선영/소냐 였다. 소냐의 열 여섯 소녀상은 감히 상상이 되질 않아 보다 적격일 듯한 전미도씨로 보고 싶었지만, 날짜를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좋았던 점, 훌륭하다고 느꼈던 부분부터 짚어보자면...
먼저, [영웅]의 주역 정성화씨. 정말 이 분의 심지 곧고 바르게 뻗어나가는 투사다운 소리에 깜짝 놀랐다. 정성화씨의 무대를 처음 보는 일행은 '단지동맹' 넘버가 끝나고 나서 정성화가 어디 있냐고 내 귀에 속삭일 정도였으니까. 그야말로 독립투사이자 영웅다운 정성화씨의 안중근. 세간의 호평이 납득이 간다.
그리고, 무대 미술과 조명. 와, 이렇게 재치 있는 무대라니. 겹겹의 벽을 활용해서 만들어내는 또 다른 무대, 움직이는 기둥과 그 위에 프로젝터로 쏘는 영상만으로 멋지게 연출해내는 긴박감, 철제구조물을 매우 영리하게 활용한 공간감, 서정적이기까지 하던 눈속을 달리는 기차와 객차 내의 풍경, 촘촘하고 정교한 실제 스테인드 글라스의 느낌을 생략하고 압축해버렸지만 오히려 더 아름답던 은은한 보랏빛의 스테인드 글라스, 하얼빈역에 빠르게 당도하던 기차, 사선과 직선으로 겹겹이 쏘아내리던 조명이 표현하는 아찔한 깊이감. 프로그램북의 무대 미술 담당을 뒤적이게 할 만큼 멋지더라.
또 정말 좋았던 건 앙상블. 앙상블의 노래와 군무가 탄탄하더라. 때때로 배우들의 노랫소리나 대사가 묻힐 정도로 MR 볼륨이 커서 인상을 찌푸리게 되기도 했는데, 일단 배우들의 노래가 제대로 들릴 때는 귀가 호사로웠다. 특히 왕웨이의 죽음 앞에서 울려퍼지는 남자 배우들의 아카펠라가 빚어내는 화음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그리고 독립군에 대한 일본순사들의 추격씬은 [영웅]의 백미! 우와, 이런 건 또 진짜 오랜만에 느껴보는 경탄 아니던가. 이건 정말 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설명 못할 장면. 움직이는 벽과 그 위를 달리는 프로젝트 영상과 철제구조물과 조명과 사람들의 움직임이라는 아주 간단해보이는 장치와 조합을 이용해서 보여주는 그 어마어마한 추격씬이라니. 철제구조물을 끊임없이 아슬아슬하게 타 넘고 통과해내고 매달리며 쫓고 쫓기는 사람들. 절도 있는 군무. 비록 앙상블의 절도 있는 움직임이 모든 장면에서 매력적으로 지속된 건 아녔지만ㅡ일례로 일본군들의 이토 히로부미 환송 예도(라고 해야 맞나) 장면은 왜 이렇게 엉성해뵈던지. 안 그래도 이토를 환송하는 인파도 별로 없는데 일본군들이 절도 있게 움직여주면 훨씬 멋진 장면으로 연출이 되었을텐데 말야ㅡ이 추격씬 하나만으로 엉성한 다른 모든 것들이 다 눈 감아질 정도로 매료되었던 지라, 열렬한 박수도 모자라 환호할 뻔 했지 뭔가.
헌데, 이 모든 훌륭한 요소들을 끈끈하게 한데 묶어주기에는 조금 역부족으로 보였던 장면장면의 분절과 너무 서두르는 감정들이 몰입을 방해했다. 순수 공연시간만 140분이라면 꽤 긴 시간인데, 그 긴 시간 안에 분절되는 장면을 모자이크처럼 툭툭 끊어 넣는 대신 조금 더 시간을 할애하여 감정의 흐름으로나 연출의 흐름으로나 완결된 장면들이 부드럽게 연결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각 씬을 조금 더 늘이고, 씬과 씬의 이음새에 조금만 더 기름칠을 했으면 하는 느낌? 그리고 당혹스러울 만큼 너무 갑작스러운 움직임(감정이든 동작이든)은 조금 늦추어 완급 조절해주었으면 하는 생각? 링링이 갑자기 죽는 장면이라던가 설희가 갑자기 단도를 꺼내 이토를 찌르려는 장면은 너무 서두르는 느낌이라 각 장면이 표현해야 할 비통함, 애달픔, 두려움, 기개가 객석까지 쉬이 와 닿지가 않는다. 기실 이 장면들은 링링과 설희 각 인물의 클라이막스나 마찬가지인데도.
장면장면의 설익음 때문인지, 아니면 자꾸 마음 한 구석을 거슬리게 하던 다른 이유에서인지, 결말로 향하면서 점차 번져가는 주변의 훌쩍이는 소리에도 눈물이 나지는 않더라. 오히려 극 초반에 울컥하던 부분이 두어 군데 있었는데, 어머니 조마리아가 나오는 부분에선 오히려 맹숭맹숭. '눈물이 없으면 영혼도 없다'는 설희의 대사를 빌자면, 난 영혼이 없는 거였나.
분명 잘 만들어진 작품이고, 순간순간 경탄하게 되는 훌륭한 요소들도 포진해있건만, 마음을 깊이 움직이지는 않던 작품. 정공법으로 영웅과 투사의 이미지를 보여주는데도 뭔가 미진하던 기분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영웅물이라면 깜빡 죽는 나인데. 작품의 드라마를 위한 약간의 허구를 제외하고는 이 모든 것이 실제 역사라는 사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중에도 친일과 항일, 식민과 해방의 역사가 전쟁을 직접 겪어본 적 없는 나의 세대에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면면히 계속될 거라는 비정한 진실에 대한 숙연함이나 비장함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