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2/26 엄태리-박정표-이봉련, 빨래, 알과 핵 소극장
"빨래를 하면서 얼룩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같은 오늘을 털어내고 주름진 내일을 다려요. 잘 다려진 내일을 걸치고 오늘을 살아요." 밭은 숨으로 울음을 겨우겨우 삼키며 울고 또 울고 울었더니, 인터미션 때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1막의 시작부터 끝까지 눈물이 멈추질 않고 주룩주룩. 다른 관객들만 없었다면 참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했을 거다. 옆 사람한테 방해되지 않으려고 숨죽여 운다고 울었는데, 어느 대목에서는 도저히 주체할 수 없을 지경으로 흐느낄 수 밖에 없었다. 어쩜 이래... 뮤지컬 보면서 이렇게 펑펑 운 적은 처음이다.
소극장에서의 공연은ㅡ격한 감정 연기가 필요할 경우에는 특히ㅡ자칫 잘못하면 감정 과잉으로 흘러 연기하는 배우나 관람하는 관객이나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면이 있는데, 아주 아담한 소극장, 아담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이 <빨래>라는 극은 넘치는 감정들을 굉장히 자연스럽게 객석으로 흘려보내더라. 연기하는 배우들도 진심이고, 극을 관람하는 관객들도 진심인 순간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가는데 정말이지 울다 웃다 울다 웃다 도무지 정신이 없었다.
가창력 발휘할 수 있게 죽죽 뽑아내는 화려한 넘버들은 아니지만, 마음을 꾹 죄었다 풀었다 하며, 서정적이었다가 유쾌했다가 희망차지는 뮤지컬 넘버들도 난 참 좋더라. 극본도 좋고, 무대 연출도 좋고, 또 연기는 왜들 그렇게 잘하는 건지. 화려한 뮤지컬 넘버와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앞세워 엉성한 연기는 대충 숨겨둔 <지킬앤하이드>만 줄창 보다가 어느 배우 하나 빠지지 않는 연기력으로 무장된 이 극을 보니까 너무 신선한거라... (물론 <지킬앤하이드>와 <빨래>를 동일선상에 두고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하더라도)
내주 31일이 막공이라 빠듯하지만, 꼭 한 번 더 보러 가야겠다 싶다. 다시 가면 망설임 없는 기립으로 감동의 인사를 전하리라 다짐 중이다. 객석의 반응이 열광적이긴 해도, 소극장이다보니 기립하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너무 튈까봐 차마 기립 못했는데 마음으로는 벌떡 일어나 빨래 널어놓은 옥상까지 이미 올라간 상태였다구. ㅎㅎ 내년 4월에 임창정 캐스트로 연강홀에서 다시 올린다는데 중극장에서의 무대 세팅과 연출은 또 어떻게 바뀔지 궁금. 어쨌거나 이런 창작 뮤지컬 완전 찬성일세~ 2시간 가량의 공연 덕분에 '잘 다려진 내일을 걸치고 오늘을 살' 힘을 얻을 수 있다면야. :-)
p.s.
# 이로서 <싱인인더스카이>에서 눈여겨 보았던 엄태리의 무대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마이페어레이디> 여주인공 일라이자 캐릭터와 맞지 않아 중도 탈락했지만, 그 누구보다 눈에 띄던 배우였는데, <빨래>에서 보게 되어 무척 반가울 따름. 이 아가씨... 노랫소리에 동그란 공간을 열어두고, 그 속에 이런저런 감정을 채울 줄 알아서 좋더라.
# 박정환씨 좋다는 평이 많던데, 박정표씨 캐스트로 본 솔롱고도 순박하고 여린 느낌이 좋았다. 특히 <참 예뻐요> 같은 노래에 잘 어울리는 목소리. 솔롱고가 극의 핵심은 아니라서 누가 솔롱고역을 맡든 극 자체에 큰 임팩트를 주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슬몃 들긴 했지만, (본인이 <빨래>의 솔롱고 역할 해보고 싶다고 해서 하는 말이지만) 그래도 역시 광호군이 연기하는 솔롱고 보고 싶다 ㅠㅠ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잖아.
# 주인할매역의 이봉련씨... 와, 이 분 대체 뭐냐며... 억척스럽지만 정 많은 할머니에서 빠릿빠릿 일잘하는 서점직원, 여고생까지 넘나드는 그 연기에 탄복... 처음엔 익숙한 얼굴인 엄태리씨를 좇다가 나중엔 이봉련씨만 계속 따라잡게 되더라.
# 낫심역의 정문성씨 심하게 귀엽더라 ㅠㅠㅠㅠㅠㅠㅠㅠ
# 한 가지 더. <빨래>의 미덕은 리얼함인데, 물 뚝뚝 떨어지는 빨랫감, 꾹 비틀어 짠 빨래를 탁탁 털 때 분사되는 물방울, 옥상 위 빨랫줄에서 바람에 살랑살랑 마르는 옷가지, 비누칠 팍팍 발로 첨벙첨벙 물 튀기며 빠는 이불 빨래, 발 시렵다 가지고 나오는 김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 이런 것들을 그대로 보여줘서 참 좋더라. 솔롱고 집주인의 가차없는 발길질은 또 어떻고. 복부에 가해진 발길질에 솔롱고는 리터럴리 휭 날아서 나가떨어지고 나중엔 무지막지하게 밟히는데, 아... 너무 끔찍해서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이거 원, <지킬앤하이드>의 스트라이드 뺨때리기 신공이랑 너무 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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