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플레이빌

[지킬앤하이드] 늦게까지 잠들 수 없던 밤. 2008/12/21

08/12/17 홍광호-김소현-소냐, 지킬앤하이드, LG아트센터

희한했다. 그 날 공연장 내 공기의 밀도는 여느 때보다 높게, 암전된 무대 위의 어둠은 여느 때보다 더 짙게 느껴졌으니까. 아무래도 밤 공연이라 관객도 배우도 집중도가 높아지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 날의 공기는 확실히 보통 때와는 달랐다. 그리고, 나는 이 날, 이번 공연 시즌 중 최고의 <지킬앤하이드>를 보았다. 

드라마틱하기로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엉성하기 짝이 없는 이 극에 내가 감동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허둥지둥 찍는 마침표 같은 엔딩은 때론 커튼콜을 위한 준비 신호 같은 느낌마저 주기도 했었는데, 이 날의 엔딩에서 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했더랬다. 얻어맞은 듯 정신이 조금 나갔고, 마음이 아팠고, 그래서 무대가 암전되고 잠시 동안은 박수조차 칠 수가 없었다. 홍광호는 17일 공연에서 비로소 이 극이 지닌 엉성한 틈을 차곡차곡 메워주었고, 그게 무엇이었던 간에 그가 전하려고 했던 감정들이 나에게 고스란히 와닿았다. 

고작 나흘만에 이렇게 다른 모습이라니... 어쩜 이래... 혹시 홍광호가 달라진 게 아니라, 나의 관극의 자세가 달라진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만큼의 '기대 이상의 발전'. 

연기가 확실히 좋아졌다. 루틴에서 벗어나고 있다. 지킬을 연기할 때 공중에 떠 있던 대사 발성이 아래로 내려왔고, 완급 조절도 훨씬 좋아졌다. 공연 초반에는 전반적으로 조급하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젠 긴장감을 고조시켜야 할 부분에서는 효과적으로 속도 조절을 하는 게 보인다. 게다가 이 날은 지킬의 비주얼마저 꽤 훌륭했으니, 조명발 제대로 받으며 악 소리 나게 빛나던 프로필이라니... @_@ 

여전히, 숙맥 같은 느낌은 나지만ㅡ레드렛에서 루시와 나란히 테이블에 앉아 대화 나누는 장면에서는 소개팅 처음 하는 순진 청년 같아서 어찌나 웃기고 귀여운지ㅡ이전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엠마와의 절절함을 보여주더라니까? 와... 정말 놀랐다. 루시와 붙여 놓으면 터져버릴 듯한 텐션은 첫공 때부터 확인해왔지만, 엠마와 이런 느낌 내는 건 처음 봐. <내가 걷는 길(I Must Go On)>에서 <당신이 나를 받아준다면 (Take Me As I Am)>로 이어지는 간주 부분에서 끊어질 것 같은 호흡으로 간절하게 "엠마..."라고 부르던 거, 이거 전에는 안 했던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거야, 홍!!! 왜 갑자기 이렇게 엠마를 사랑하게 된 거야!!! (ㅋㅋ 갑자기 담소장에서의 엘가님 코멘트가 떠올라서 폭소)

<컨프론테이션>은 볼 때마다 좋아지고 있고, 전체적으로 연기가 디테일해지고 있다. 이 날의 하이드의 왼손 연기도 이전에는 본 적 없는 거라 깜짝 놀랐는데, <미워하긴 힘들죠> 장면에서였던가 왼팔에서부터 오른팔까지 온몸을 도저히 통제할 수 없다는 듯 부들부들 떨 때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었다. 와... 이건 또 뭐야... 

하지만, 이 날 내게 최고의 충격을 안겨 준 건 마지막 결혼식 장면에서 지킬이 죽던 순간. 성혼서약 중 하이드로 변해서 스트라이드를 죽이고 그토록 사랑하는 엠마를 위협하기까지에 이르자,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눈 어터슨씨를 향해 지킬이 "존, 지금이에요... 나를 풀어줘요... 부탁이에요... 제발......"이라고 말하는데, 매 공연마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이 지킬인지 하이드인지에 대한 배우와 관객 모두의 해석이 달라지곤 한다. '나를 풀어달라'고 애걸하는 건, 완벽한 은신처를 찾아 지킬을 잠식한 하이드인지, 아니면 악마같이 등에 붙은 하이드를 결코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 지킬인지... 사실 그게 누구냐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싶어도, 어느 날은 그게 너무도 분명하게 지킬이고, 또 어느 날은 아닌 것 같아서 공연 때마다 그 장면에 집중하게 되는데, 이 날 공연의 홍광호는 차마 지킬에게 칼을 겨눌 수 없어 돌아서는 어터슨의 칼을 자기 복부에 꽂아박았다가 빼고 뒤로 픽 쓰러지면서 씩 웃는 거였다. 이건 또 뭐야????????? 여기서 이런 표정 지은 적 없잖아, 홍!!!!!! 와...... 안도와 해방감, 자조와 경멸이 뒤섞인 그 서늘한 웃음에 나 완전 충격 받아서 전율. 정말 그 웃음, 그 표정, 그 감정은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거라... 

이 날 소냐 첫공이라 소냐가 긴장을 많이 했는지 초반에 음정도 불안정하고 가사도 틀리고 대사 치는 연기도 과해서 적잖이 실망했는데, 그럼에도 불구 홍광호의 연기만으로 모든 게 커버되던 공연. 덕분에 새벽 네시까지 잠들 수 없을 정도로 잔뜩 들떴더랬다. 이 날 정말 희한하게 좋았지. 이사회 역할 맡으신 배우들도 다들 디테일이 생생하게 살아있었고, 감정 표현도 좋았고... 아, 이 날처럼 좋은 공연 다시 볼 수 있을까? '완벽'한 공연이 아닌 이처럼 '좋은' 공연을. 

어쨌거나 분명한 건 홍광호가 발전하고 있다는 것.
comment [3]
소리
081221  del
아. 미뤄두면 또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할 것 같아. 주요 감상 포인트만 두서없이 휘갈겨버렸다. 이 날의 공연에 대해선 좀 더 성의있는 후기를 쓰고 싶었건만... 13일 공연의 타격을 제대로 반전시킨 이 날의 공연. 나는 그냥 할렐루야를 외치며, 홍만 믿고 ㅊ달리기로 했다.
이은진
081223  del
문득...야심한 밤에 지킬앤하이드 노래를 듣다가 소리 게시판을 보니 올린 글 절반이상이 홍광호로 가득찼더구나...^^ 
근데 노래 듣다가 급 우울해졌어...지킬이 끝나면 공허할 것 같은 마음이 우울하게 만드는...좋은 공연이 막을 내리는구나..라는 생각에...역시 새벽녘으로 넘어가는 시간엔 감정이 이성을 마구 억누르는구나...-.-ㅋㅋ 
귀연 광호군을 만난 건 재미있었지만...너무 가까이하기엔 먼 당신이란 걸 깨달은 마음에 또 한번 우울해진다는...ㅋㅋㅋ
소리
081224  del
은진, 넘 걱정마! 지킬앤하이드가 끝나면 또 우리의 빈 구석을 채워줄 새로운 공연이 등장할테니. 그냥 홍만 믿고 달리세~ ㅎㅎ 하지만, 분명... 2월 막공이 끝나고 나면, 허무하고 공허할 것 같긴 해. ㅠㅠ 그러니, 더 열심히 달려야겠다! (읭?????) 

아, 참. 너한테 보내 줄 게 있는데 귀가후 메신저에서 만날 수 있는 타이밍이 맞지가 않네. 조만간 일찍 귀가하게 되면 온라인에서 접선해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