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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빌

Be, Not Be, 2008/09/15


햄릿

장소
뮤지컬 전용 극장 - 씨어터 S
출연
임태경, 박건형, 이지훈, 김승대, 윤형렬
기간
2008.08.21(목) ~ 2010.02.22(월)
가격
-

평론가도 아니거늘,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늘어놓아도 하등 문제될 것 없을텐데, 무언가를 읽고 듣고 본 이후의 감상을 정제된 언어로 조목조목 표현하는 것은 늘 어렵거나, 부담스럽거나, 몹시 귀찮은 면이 있다. (하긴, 요즘엔 잡담 몇 줄도 적기가 쉽지 않지만.) 단 몇 줄이라도 기록해두는 게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이유로 아무런 기록없이 아스라히 떠나보내버린 감상들이 셀 수 없을 정도.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아, 이렇게 미리 방패치고 결코 정제되지 않은 글을 끄적끄적ㅡ

ㅁ 뮤지컬 햄릿

이 날의 시작은 뭐라 해도 남영동 [쭈꾸시]에서부터. 

지난 주, 집에 가는 기차 안에서 숙대입구 맛집 소개 기사를 읽고는 가야겠다 적어둔 이자카야다. 공연 시작 시간 때문에 전투적으로 스피디하게 음식을 주문하고 먹어야 했는데, 나오는 음식마다 다 맛있더라. ㅠㅠ 바삭하게 튀긴 뜨거운 고로케, 담백하면서도 감칠맛나던 돼지고기 샤브샤브 샐러드, 윤기 좔좔 흐르던 장어구이, 달콤하기 그지 없던 천사새우, 쭉쭉 늘어지는 끈끈한 낫또, 야끼소바, 두부요리 등등에서부터 부드럽고 깔끔하게 넘어가던 구보다 센쥬까지, 어느 하나 나무랄데 없는 맛있는 먹거리. [지금 못먹으면 언제 먹으리] 정신으로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발휘하여 1시간 동안 수많은 접시를 비우고 자리를 나섰다. 

홀짝홀짝 마실 때는 부드럽고 달콤하더니 몇잔 마셨다고 기분 좋게 알딸딸. 음주가 공연에 미칠 영향에 대해 슬쩍 근심하는 척 하며 씨어터 S로 향했다. 좌석 위치도 좋았거니와, 열간 경사도 어마어마하여 시선 확보 문제가 전혀 없었다. 무대 상층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냥 편안히 좌석에 기대어 누워서 보면 되었고. 

그렇게 관람한 뮤지컬 [햄릿]은 놀라웁게도 여태껏 내가 보아온 어댑테이션 중 가장 재밌는 [햄릿]이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또한 재미없는 [햄릿]을 무대에서 보아왔던가. 그런데 이번엔 뮤지컬이라. 그래서 사실, 뮤지컬 자체에 대해선 아주 큰 기대 없이, 임태경의 노래를 직접 듣는다는 데에(물론 뮤지컬이니 노래가 전부는 아니지만) 더 큰 의미를 두고 왔는데, 이게 꽤 재밌더란 말씀. 'With enthusiastc audiences giving standing ovation after standing ovation, Hamlet as a musical suddenly seems like a perfectly sane idea.'라는 프라하 포스트의 리뷰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일단, 주연 배우의 훌륭한 가창력과 표현력,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배우의 발견, 은근히 귀에 감기는 멜로디도 좋았지만, 오로지 개인의 욕망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비극에 집중하는 [햄릿]이 굉장히 와닿았다. 사실 그게 바로 [햄릿]의 정수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문유님의 표현을 빌자면 '국가와 사변을 걷어낸 치정극'으로서의 이 원초적인 [햄릿]에 기대어 원전을 더욱 생생하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으니. 

거트루드와 클라우디우스에게 각기 목소리를 심어줌으로써 완전한 치정극으로 거듭난 뮤지컬 [햄릿]의 주연 햄릿은 영웅이라기보단 격정적 사춘기를 겪는 소년 같은 캐릭터라, 주연 배우가 아예 어린 소년이라면 좀 더 그럴 듯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랬다면 임태경을 태경님으로 모시는 계기 따위도 없었을 터. 독 묻은 칼에 찔려 죽어가며 청초하면서도 슬피 '죽는 것, 사는 것' 하며 부른 [Be, Not Be(안식)]는 정말이지 다시 듣고 싶다. 그건 그렇고, 박은태 레어티스가 과잉 감정을 발산하긴 했지만, 이 뮤지컬 어댑테이션은 기본적으로 오필리어-레어티스 근친상간 요소를 깔고 가는 듯. 햄릿하고는 별로 절절치 않은 오필리어가 레어티스와는 미친 듯 절절하다는 게 어찌나 아이러니하던지. 어떤 관객은 대놓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레어티스가 무척이나 가련하더라'는 감상 후기를 쓰기도 했던데. 후후.  

아, 역시 이번 공연 막내리기 전에 다시 한 번 임태경 햄릿으로 보고 싶다. 링거 투혼 말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는 태경 햄릿으로. (하지만, 커튼콜 때 남경읍씨가 말씀해주시기 전까지는 태경님이 펄펄 끓는 고열로 링거 맞고 누웠다가 관객과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무대로 달려온 줄은 까맣게 모르고, 엄청 열심히 스텝 맞추며 춤추는 모습에 조금 웃기도 했는걸. ㅠㅠ 그 몸으로 그런 무대가 어찌 가능하더란 말이냐.) 

이 날 공연은 정신적으로 피폐한 요즘 내 일상에 한 줄기 햇살처럼 쏟아져 내려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내 삶을 충만하게 해 주고 있다. 그리하여, 연료 가득 채우고 현재 몹시 달리는 중. :-)

p.s. 브로드웨이 햄릿 넘버 중 공식 홈페이지( http://musicalhamlet.com )에 있는 몇 곡 잠시동안-

comment [7]
소리
080915  del
이렇게 판 깔아놓고 댓글로 편하게 수다 떨어야지. :-) 

커튼콜 때 배우들이 각자 자신의 테마곡의 몇 소절씩을 불러주는 것도 좋았고, 햄릿과 오필리어의 엔딩도 귀여웠고. 하지만 케미스트리는 어따 내다 팔았다니. ㅎㅎ 이것도 아이러니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에서 정작 케미스트리는 합법적 연인이 아닌 다른 관계에서 발산된다니까...
080915  del
브로드웨이 원곡들 들으니 한국판 오필리어의 역량이 확실히 아쉽군요. 임태경은 전혀 꿀릴 것 없는 보이스톤과 성량인데 말이지요. Rise above this world도 그렇고 원곡 사운드트랙 참 좋네요. 전 임태경 햄릿이 설득력 있었던 게..딴 건 몰라도 미친 치정극 속에서도 끝까지 어떤 '기품'은 놓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임태경의 매력이죠, 사실. 심지어 미쳤어-돌았어- 할 때도 품위있어서 좋았어요. 그게 사실 나머지 캐스트에서는 상상이 안 가는 부분이고...
소리
080915  del
저도 브로드웨이 버전 들으면서 오필리어가 제일 걸렸어요... (다른 캐스트는 우리 배우들이 꿀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더 훌륭하기도 하구요!) 씨어터 S에서의 오필리어는 태경 햄릿과 음색/창법이 어울리지가 않아서 멋진 앙상블 따위 구현 안되구... ㅠㅠ 2명 더 있는 것 같던데, 다른 오필리어는 어떤가 모르겠네요. 

하니님 말씀처럼, 임태경은 정말 기품 있어요... 흑발의 청순비련 귀공자... 생각할수록 다시 보러 가고 싶네요. 햄릿에 홍광호도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ㅠㅠ 그럼 또 당장 내일표 끊어서 갈텐데 말이죠. ㅎㅎ
coolcat
080916  del
실상은, 기품을 놓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놓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되어 향후 가시는 길 내내 따라야 할 팬 입장으로서는 자못 착잡한 심정 T.T 

브로드웨이 캐스팅은 다만 체중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나 보군요 ㅋㅋ 나머지 오필리어 중 한 명은 '뮤지컬 햄릿으로 데뷔'던데 과연 어떨지... 임태경 햄릿인 날에는 모조리 전효은 오필리어라 알 길이 없네요.
080916  del
coolcat/ 하지만 앤소니처럼 막 굴러먹은 선원님이 기품을 놓지 않으시면 곤란하지만 ㅎㅎ 덴마크의 크라운 프린스라면 당연히 끝까지 놓지 말아야지 말이야. 애초에 '놓을' 기품조차 없는 캐스팅이라면 이 극이 더 황당무계했을 듯 ㅎㅎ 클로디어스와 햄릿의 차이도 없을 거 아냐 @@ 그거야말로 원작의 전복.
080916  del
제가 그 오필리어도 봤는데, 우리가 함께 본 오필리어보다도 더 연약하고 갸날픈 아가씨이니 궁금해하지 않으셔도 되요. 물론 프리뷰때 본 거라 공연 진행되면서 많이 발전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본 쪽이 낫다는...(쩝)
소리
080917  del
우리가 본 오필리어가 그나마 낫다니... 좀 아쉽네요. 오필리어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그런 캐스팅을 한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구요. 뭐, 여리여리 갸날픈 건 차치하고, 태경 햄릿과 음색만 잘 맞았어도 좋았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