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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중독

어느 성스성애자의 고백, 2010/09/27

"[성균관 스캔들] 시청 이후, 그 어떤 티비 프로그램도 모두 심드렁하기만 해요. 그나마 기다리며 챙겨보던 슈퍼스타 K2 마저도 재미가 없어요." 라는 고백에, 

"성스성애자가 되셨군요."라고 ㄲ님은 매우 적절한 진단을 내려주셨다. 

아니나 다를까, [성균관 스캔들] 첫 시청 후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나는 완전한 성스성애자로 변모한 것이다. 원래도 단기 버닝으로 점철된 인생인데다가, 뒷심 부족한 드라마에 실망해 시청자로서 중도하차한 사례도 많다보니, 이토록 옴팡 빠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양 할까봐 미리부터 걱정도 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한눈에 반한 드라마는 [궁(宮)] 이후로 참 오랜만인 듯 하다. 

며칠 전에도 썼지만, 청춘/성장/학원/시대물이라니. 이건 정말이지 취향 직격의 이야깃감인 것이지. 젊고 아름다운 청춘들이 구 시대에 맞서며, 동학들과 쉼없이 배우고 겨뤄가며, 깨지고 아파하고 위로받고 성장하는 이야기. 게다가 글이라고는 언문이나 겨우 허락된 시대의 여성이 남장을 하고 성균관의 유생으로 살아간단다. 남장여자인 극중 윤희의 말을 빌자면, '하루하루 난중일기가 따로 없는' 삶이다. 

이런 얘기가 재미없기도 참 쉽지 않을 거다. 이번 계기로 원작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을 살짝 접하게 됐는데, 각색의 힘이 대단하다. 선준과 윤희의 경우, 드라마쪽 캐릭터가 훨씬 좋다.  

남녀상열지사로만 풀어나가도 충분히 재밌겠지만, [성균관 스캔들]이 특히 마음을 끄는 건, 시대상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다. 붕당정치, 이를 견제하기 위한 군주의 탕평책,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이르는 금등지사... 역사적 팩트는 차치하고라도 다시 국사책을 펼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러한 시대상에서 찬연하게 펼쳐지는 각기 다른 캐릭터들의 충돌과 융합, 자기반성과 성장담은 또 어떤가. '군자불기(君子不器)'를 몸소 강하며 진리는 스스로의 질문에서 찾는 거라고 일러주는 스승, 이전에는 접하지 못했던 깨우침에 눈에 덮힌 꺼풀을 한 겹 벗어버리는 유생들, 틀린 말이라고는 평생 해 본 적 없는 반듯한 이선준과 세상에 대한 분노심으로만 가득했던 문재신이 윤희를 만나 깨어지고 누그러지는 모습, 반대로 그런 선준과 재신을 통해 자신의 과녁을 마주하게 되는 윤희, 거듭되는 좌절과 성취, 야비하게 짓밟을래도 짓밟히지 않는 고결함... 흡사 순정만화 같은 이 드라마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함께 만나게 되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정통성을 상징하는 군왕과 대칭축을 이루는 사대부도 균형 있게 다루고 있어, 곱씹게 되는 대목이 많다. '금상 위에 좌상'이라는 표현대로 실세를 장악하고 있는 좌상대감의 의미심장한 아래 대사에는 과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전제군주의 정통성이라는 것은 그를 인정해주는 지도층과 민중에게서 오는 게 아니던가. 그리고 정통성에서 비롯된 권력을 오로지 민중과 국가를 위해 활용했던 군주는 과연 얼마나 존재할 것이냔 말이다. 

"이 나라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다. 임진년과 병자년, 두 번의 전란 속에서 이 나라 왕조가 한 일이라고는 백성을 버리고 몽진을 가거나 오랑캐 앞에 엎드린 일뿐. 그 때마다 백성을 일으키고 사직을 지킨 건 우리 사대부였다. 그런 사대부를 붕당의 무리라 단죄하고, 모든 권력은 군왕이 갖겠다는 것이 탕평책의 실체다."

물론, 로맨스 소설이 원작인 [성균관 스캔들]의 주축이 되는 요소인 로맨스는 말해 무엇하리. 남장여자이기 때문에 일어나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과 화학반응은 때때로 물리적인 자극을 느끼게 한다. 금서 매매 현장에서 덜미를 잡혀 바위 밑에 피신했을 때 윤희가 여자인지 모르고 몸을 밀착하고 힘껏 껴안는 선준과 그 품에서 벗어나려고 무용히도 애쓰지만 결국 그렇게 붙들려서 선준의 목울대를 보고 기겁을 하고 고동치는 심장을 어찌할 줄 모르는 윤희. 선준의 품에 갇힌 윤희가 그의 목울대를 제일 먼저 바라보게 되면서, 신체에 있어 이성간의 다름을 새삼스레 인지하고 그로 인한 실제적 화학반응을 느끼게 되는 이 장면의 연출이 참으로 생생했다. [성균관 스캔들]의 드라마 작가가 로맨스에 취약한 게 아니냐는 세간의 항의가 빗발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여러모로 꽤 섬세한 대목과 연출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반한 것은 여주인공의 캐릭터다. 제일 처음 시청하게 된 게 6강의 후반부였는데, 여주인공이 대사례 승부를 조작하고자 했던 저열한 인간에게 주먹을 날리더라. 게다가 쌍코피를 터치더라구. '사내놈이 구질구질하게 좀 살지 말라'는 상콤한 마무리까지. 아, 이 엎치락뒤치락 우중결투씬에서 내가 홀라당 반했던 거지. 이 씬이 아녔다면, 이렇게 첫눈에 옴팡 빠지진 않았을거야. 

두서 없이 결말도 없는 글을 이토록 적어내리고 있는 것은 성스성애자로서의 커밍아웃을 제대로 하기 위함이며, 과히 오랜만에 느끼는 이야기에 대한 매력에 달떠 있기 때문. 나를 글쓰게 하는 [성균관 스캔들]이라니, 하하... 내 월요일을 다 기다리게 될 줄이야.
comment [3]
소리
100927  del
하.... 오타 수정도 맘대로 못하는 아이폰. 내일 수정해야지. 어떤 오타가 났는지 알아맞추셔도 상품은 없슴다... 죄송 ㅠㅠ
꿀꽈배기
100927  del
저희 어머니께서도 지난주 재방으로 홀랑 낚여서 이번주부터는 본방 챙겨볼 거라고 하시던데..... 유들유들하게 주고 받는 정치적인 대사들이 상당히 맘에 든다 하시더군요. :) 주위에서 다 추천 중이라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도 이미 절반 분량이나 방송됐는지라 언제 다 복습해 싶기도 하고 ㅠㅠ
소리
100927  del
ㄲ님, 아직 1/3밖에 안 했슴다! 본방 사수가 불가능하시니 아무래도 실시간으로 챙겨보시긴 어렵겠지만, 주말에 재방도 있고. KBS 무료 다시보기도 있고 (근데 화질이....), 심지어 유투브에도 나름 고화질 영상이 올라오고 있슴다. 닥복의 경로는 무궁무진하다구요~! 

ㄲ님과 제 취향이 언제나 겹치는 것이 아니라, 추천하는 마음에 늘 자신있는 건 아니지만(^^), 어머니께서도 추천하신 드라마이니 함께 봐요~ 저 요즘 성스 전도하고 다님. 어제도 2명, 오늘 점심 먹으면서는 3명에게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