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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드 데이즈/DC 2005.8~2007.8

부치지 못한 편지, 2007/06/26

당신에게, 

쓰다 만 편지들을 끝내 부치지 못하고 또 이렇게 새로 씁니다. [러브레터]의 후지이 이츠키도 아니면서 왜 그리 편지를 부치지 못했는지. 그러고보니 [올드미스다이어리]에서 우현 삼촌이 쓰신 책 제목이 "부치지 못한 편지"였던 것 같아요. 양로원에 맡겨진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편지를 우현 삼촌이 대신 받아적어 가족들에게 보내드리려다 말없이 이사를 가버리는 경우가 많아 주소가 없어 부칠 수 없었던 편지를 모은 책이었어요. 지금 제가 쓰는 편지는 그렇게 애틋한 편지는 아니지만, 그 동안 부치지 못했던 수많은 편지들을 떠올리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쓰는 편지예요. 

날이 무척 더워요. 한국엔 장마가 시작되었다는데 마음 눅눅하지 않게 지내고 계신지요. 전 어제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러 갔었어요. 운하와 강변 따라 나 있는 자전거 트레일이 디씨 내와 근교 곳곳에 많은데 이제서야 처음으로 바이킹을 다녀왔네요. 이 곳에 정착하게 된다면 마음 붙이고 하나씩 하고 싶은 일이 많아요. 곧 있으면 떠날 텐데, 하면서 지레 검열해버리고 시작도 하지 않은 것들이 많아요. 고양이도 키우고 싶었고, 자전거도 사고 싶었고, 들이고 싶은 주방 기구도 많았고, 또 뭐더라... 녹음이 우거진 트레일을 자전거로 달리며, 보트를 빌려 한껏 기분 내며 노 젓는 사람들과 공원에서 낙원 같은 소풍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서, 하고 싶은 것들이 또 늘어났어요. 

치킨 샌드위치를 먹으러 (조금 과장해서) 폭염을 뚫고 20여분을 걸어왔어요. 예전에 한 번 먹고 너무 맛있어 그 맛이 잊혀지질 않고 가끔 생각났었는데 다시 먹어도 역시 맛있어요. 터키 사람이 주인인 지중해식 샌드위치 가게인데, 정통성에 대해서 논할 식견 따위는 없지만 맛은 보장해요. 닭고기와 모짜렐라, 토마토와 바질이 듬뿍 들어간 페스토 소스를 바삭한 빵에 끼워 샌드위치 그릴에 꾹 눌러 지진 샌드위치인데, 아... 한 입 베어물자마자 기분이 마구 좋아지는 그런 맛이에요. 

아, 자전거 이야기를 더 하려고 했어요. 사실 저는 쉬엄쉬엄 놀면서 즐기면서 탈 요량으로 가볍게 나섰는데, 막상 가 보니 하드코어한 싸이클리스트들의 집합소더라고요. 놀이보다는 운동으로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헬멧은 기본이고, 스판덱스 소재의 싸이클 복장까지 갖추고 지치지도 않고 쌩쌩 달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저는 계속 추월당하곤 했지요. 아기를 실은 낮은 유모차를 매달고 달리는 사람들, 아들이나 딸과 함께 탠덤 자전거를 모는 부모들도 놀이가 아닌 운동 수준으로 달리는데 교통의 흐름을 막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저도 쉬지 않고 페달을 굴렀어요. 동상이몽이라고, 같이 간 친구들 역시 운동할 생각으로 나왔더라고요. 혼자였으면 노닥노닥 쉬엄쉬엄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가다 서다 그늘에서 쉬다 했을텐데 같이 속도 맞추느라 가는 길에 딱 두 번밖에 못 쉬었어요. 그것도 다 제가 먼저 멈추는 바람에. 자랑할 거리는 아니지만 너무 오랜만에 운동하는 거라 처음에 약 10분 정도 달렸을 때부터 엄청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25분 정도 달렸을 때 한 3분 정도 쉬고 물 마시고 다시 열심히 언덕도 오르내리고 다리도 건너고 하며 달리다가 45분쯤 되었을 땐 더 이상은 도저히 못 달리겠는 상태가 되어서 그늘지고 바람 솔솔 부는 벤치에 턱 자리잡고 말았죠. 한 발 늦게 도착한 친구들에게 "나 괘념치 말고 더 갔다와라. 한 15분 정도 더 달렸다가 방향 바꿔 돌아가면 되니까 나 여기서 쉬고 있다가 너희 돌아오는 길에 합류하겠다." 했는데도 그냥 여기서 다같이 쉬었다 가자며 제 옆에 앉았어요. 고개를 들어 촘촘한 나뭇잎을 세어보다가 노래를 부르다가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를 멈추었다가...

돌아가는 길은 항상 짧아요. 항상 느끼면서도 늘 신기해요. 오는 길은 그렇게 숨차고 힘들었건만 돌아가는 길은 한 번도 쉬지 않았는데 힘들지도 않고 시간도 훨씬 적게 걸렸어요. 어쩌면 돌아오는 길이 체감할 수 없는 미세한 정도의 내리막길이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와 상관 없이, 언제나 언제나 돌아가는 길은 짧아요. 평지에서도, 산에서도, 이렇게 자전거 위에서도. 

마구마구 페달을 밟다가 다리를 쭉 뻗어 바람을 맞기도 하고, 커다랗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여 맞이하는 터널 반대편의 햇살에 몸을 살짝 떨기도 하고, 노 젓는 보트와 모터보트가 어우러진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웃기도 하고, 숲이 울창히 우거진 곳에서 확 끼치는 서늘한 기운에 땀을 식히고, 마주 달려오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살짝 눈인사를 하기도 하는 자전거 위의 시간들은 말할 수 없이 기분 좋았어요. 

자전거 반납소에 예상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이번엔 그럼 반대쪽으로 15분 쯤 달렸다가 돌아오자 하고는 처음 시작했던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전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길에 새로운 '시간'을 경험했어요. 꽤 오랫동안 먼 길을 한참을 달려왔고 이쯤 되면 15분도 훌쩍 넘었겠다는 생각이 들어 황급히 시계를 확인했는데 고작 10분이 지났을 뿐이었어요. 우습게 들리실 지도 모르지만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어요. 웹서핑하며 마우스 몇 번 클릭하면 금세 지나갈 10분, 보통 걸음으로는 집에서 전철역까지도 도달하지 못할 10분. 같은 10분이 그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가슴이 뛰었어요. 훨씬 농축적으로 살 수 있을 길고 긴 시간에 대한 도전심도 생겼고요. 그렇게 5분을 마저 더 달려 자전거 머리를 돌려 다시 또 열심히 쉬지 않고 돌아와 정시에 자전거 반납소에 도착했고, 오가며 달린 거리를 계산해보니 16km 쯤 되었어요. 이 트레일이 루프 형태라서 계속 달리다보면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전체 거리가 약 40km 정도라는 걸 나중에 듣고는 다음 번에는 아침에 와서 한 바퀴 쭉 돌고 여기 공원에서 점심 먹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친구들과 나누었어요. 그렇게 달리려면 전 지금부터 단련 좀 해두어야겠지요? 그거 두 시간 달렸다고 다리도 쑤시고 엉덩이가 욱신거려 죽겠어요. 

우리,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런 것들을 같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조나단 사프란 포어가 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라는 책에 보면 '그날 밤 네 어머니와 난 내가 돌아온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누었어, 마지막 같지가 않았어, 난 애나에게 마지막으로 키스한 적이 있고, 우리 부모님을 마지막으로 보았고, 마지막으로 얘기를 했지, 왜 모든 것을 마지막처럼 대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까, 가장 한스러운 것은 미래를 너무 많이 믿었다는 거야'라는 구절이 나와요. 맞아요, 어쩌면 '우리, 나중에'와 같은 공수표는 함부로 남발해서는 안 되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요즘 같은 때에 '우리, 나중에'는 좋은 예방주사가 되어주는 걸요. '나중'이 없다면 '지금'을 살아가는 게 몇 배는 더 어려울 거라는 생각을 해요. '언제나 하루만치 멀리 있는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고 노래부르는 애니처럼 말이에요. 

Lamy 만년필을 온라인으로 구입했어요. 기다리는 마음이 무척 설레요. 만년필이 도착하면, 이번에는 정말로 편지를 끝까지 마무리해서 부치겠어요. 늘 그래주셨지만, 그 때까지 잊은 듯 모르는 척 그렇게 기다려주세요. :)

ㅡ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