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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드 데이즈/DC 2005.8~2007.8

2007.3월, 라이베리아 이야기

라이베리아 이야기 (1)

먼로비아에 도착한 지 일주일째 되던 날에야 처음으로 사진기를 꺼내들었다. 그만큼 바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욱이는 우리가 처한 환경 때문이었다. A의 말마따나 라이베리아에서 보낸 약 2주일의 시간 동안 우리는 몇백 걸음밖에 걷지 않았다. 걸을 수가 없었다. 신변 안전 때문에 늘 CCF의 운전사나 CCF에서 계약 고용한 택시기사와 함께 이동해야했다. 

14년간의 전쟁은 이 땅에 많은 상처를 남겼다. 전쟁이 끝난 지 이제 3년, 처참한 폐허와 총알자국이 선명한 건물, 대학살의 장소가 도시 곳곳에 그대로 남아있고, 지난 몇년 간 재정착한 국제/국내 난민은 전기도 수도도 없는 폐허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먼로비아에 제한적으로 전기와 수도가 들어온 것도 십여년만이다. 국내 실업률은 80퍼센트를 웃돌고 아무도 서로를 믿지 못한다. 사람들은 빼앗고 빼앗기는 것에 익숙하며 강간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왜 아닐까, 성폭력은 전쟁의 수단으로 활용되어왔고, 오랜 전쟁은 라이베리아 사람들에게 쉬이 극복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리하여 우리들에겐 한낮에 고작 몇 블럭을 걸어다니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때문에 우리가 찍을 수 있는 사진이라고는 차 안에서가 고작이었고, 그나마도 범죄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달리는 차 안에서 기회를 엿보아가며 일행들이 찍은 사진이 먼로비아에서 보낸 첫주의 사진의 전부였다. 네 명이, 때로는 다섯 명이 좁게 끼어앉은 차 안에서, 그것도 달리는 차 안에서 찍을 수 있는 사진의 한계 때문에 나는 일주일 내내 가방 속에 있는 필름 카메라를 꺼낼 엄두를 내질 못했던 것이다.

아무런 인터뷰가 없었던 일요일, 멘디의 배려 덕분에 한나절 동안 CCF의 운전사 로렌스의 안내로 먼로비아 탐방을 할 수 있었다. (관광은 이 나라와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이미 인터뷰 다니면서 차 안에서 먼로비아의 여러 풍경을 볼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멀리까지 미처 보지 못했던 동네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래봤자 차 밖보다 차 안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지만, 로렌스와 함께 다닌 덕에 사람이 많지 않은 지역이나 기념품 가게에선 조금 거닐 수가 있었다. 여러 의미로 조금 여유가 있었던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폐허에 나란히 앉은 눈 맑고 수줍은 어린 소년들, 해골처럼 쇳덩이만 남은 폐차, 한 때는 관광객들을 모으던 호텔이었으나 지금은 IDP(Internally Displaced Person:국내피난민) 호텔이라 불리는 전쟁의 폐허와 그 곳의 사람들, 빽빽하게 널린 빨래,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돼지,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기념품 가게를 조심스럽게 사각 프레임에 담기 시작했다.   

라이베리아 이야기 (2)

하지만 차마 담지 못한, 혹은 감히 담을 수 없었던 풍경들이 너무나 많았다. 미안했다. 종군 기자도 저널리스트도 아니면서 그들의 처참한 일상을 찰칵찰칵 경쾌한 셔터 소리를 내며 찍는다는 것이 못내 미안하여 조용히 내 눈에, 내 마음에 담아서 돌아온 풍경이 더 많다. 게다가 내 사진기가 좀 큰가. 필름 걱정 없이 한손으로 슬쩍 찍는 둥 마는 둥 할 수 있는 디카도 아니고. 이처럼 라이베리아, 특히 먼로비아의 사진을 찍는 것은 런던이나 파리, 서울이나 도쿄의 사진을 찍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하지만 보미 카운티와 케이프 마운트 카운티에 커뮤니티 인터뷰 때문에 이틀 일정으로 다니면서는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사진을 찍을 수가 있었다. 물론 시골에서도 전쟁의 상흔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지만 먼로비아에 비해 피부로 와닿는 범죄의 위험도 훨씬 낮았고, 시각적 충격도 적어서 사진기를 들이미는 것이 조금 덜 미안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풍경이나 가옥을 찍는 것부터 시작. 커다란 사진기를 휘두르고 있노라면 호기심 어린 시선이 모여든다. 새까맣게 고운 피부, 커다란 눈망울, 수줍은 표정으로 모여드는 아이들에게 사진 찍어줄까 물으면 모두들 기쁘게 고개를 끄덕인다. 자, 그럼 찍는다. 하나, 둘, 셋!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눈 깜짝할 새 옹기종기 몰려든 동네 아이들. 너도 나도 한 장씩 찍어달라고. 달랑 사진기 하나에 자석처럼 모여든 아이들을 한데 모아 사진을 찍노라면 그들의 얼굴에도 내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하다. 일정이 바빠 팀원들은 얼른 오라며 나를 재촉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인사하고 돌아선다. 시골에 살아 외국인, 특히나 동양인을 본 적이 드문 아이들은 내 모습에 마냥 신기해하면서도 선뜻 다가오질 못하고, 내가 말을 걸어도 마을에서 쓰는 언어와 달라 잘 못 알아듣거나 수줍어한다. 그러면서도 사진기 때문인지 한참을 내 주위를 서성이며 좇는 아이들. 

어디서나 그랬다. 사진기를 꺼내면 소근거리는 아이들. 아, 저 누나 사진 찍는다. 우와, 사진기다. 그럼 나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묻는다. 사진 찍어줄까? 예외없이 끄덕이는 고갯짓. 찰칵 셔터를 누르고 나면 어느 새 몰려든 동네 아이들, 학교 아이들. 브이를 그리기도 하고 요염한 포즈를 취하기도 혹은 뻣뻣한 차렷 자세를 선보이기도. 좋아라고 소리 지르며 손뼉 치는 아이들. 얼마나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지. 이렇게 작은 것 하나에 발구르며 기뻐하는 아이들 모습에 나도 함박같이 웃으며 좋아라 하다가도 홀연 마음이 선뜩하다.


라이베리아 이야기 (3)

신기하게도 라이베리아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나의 과거와 수없이 조우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들과 당시의 감정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불쑥 되살아나곤 했다. 감히 비할 것은 아니지만 정말 그랬다. 그래서 때로는 상황과 감정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기도 했지만, 무심히 넘길 수 있는 일에 더 서글프거나 더 마음 아프기도 했다. 

사진 한 장에 이리도 기뻐하는 아이들, 셔터 소리에 발구르며 손뼉치며 환호하는 아이들, 그 사진 받아볼 수 있을 것도 아니면서, 심지어 사진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있는지도 모르겠는 아이들이 그닥 특별할 것도 없는 내 사진기 하나에 이렇게 아낌없는 웃음을 웃을 수 있다는 게 믿을 수 없이 서글프더라. 나에게는 지극한 사소함이 누군가에게는 지극한 특별함일 수 있다는 그 단순한 진리가 이와 같은 맥락으로 다가오는 순간, 가슴 한 구석이 무너졌다. 

나중에 이 아이들이 자라서, 그러니까 사진기에 광분하지 않을 나이가 되어서, 나라가 다시 안정되고 개발되어 삶의 풍요를 되찾았을 그 때가 되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기억할까. 우습게도 그 순간 소독차 생각이 났다. 하얀 연기를 뿜어내던 소독차, 그 뒤를 좇아 무리 지어 뛰어다니던 동네 아이들.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저 하얀 연기가 뿜어나오는 것이 신기해서 구름입네 천국입네 하늘입네 하며 그 연기 다 들이마시고 팔을 퍼덕이며 한참을 뛰던 나와 다시 만났다. 그 때 난 참 즐거웠는데. 정말 구름 속을 날아다니는 것 마냥 행복해서는. 허나 지금 돌아보는 그 때의 내 모습과 감정은 얼마나 처량맞고 서글픈지. 

서글프다는 느낌으로 적당한 단어를 고르지 못해 그저 '슬펐다'고 말하는 내게 A가 물었다. 왜 슬펐던 거냐고. 너무나 작은 것,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 일에 그토록 기뻐한 것이 슬펐던 거냐고.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전혀 기뻐할만한 것도, 행복해할만 것도 아닌 일에 그처럼 열광했던 것이 슬프다고. 실은 몸에 안 좋은 연기 다 들이마시면서 구름 속을 떠다니는 것처럼 즐거워했던 게 억울하기도 한 것 같다고. 이 아이들도 나중에 이 순간을 서글피 기억하지는 않을까, 그깟 사진 한 장에 그렇게 열광했던 자신의 모습이 억울하지는 않을까. 

울적했다. 모든 아이들이 이처럼 사는 것은 아닌데. 모든 아이들이 사진 한 장에 발구르며 환호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아이들이 외국 군인들이 던져주는 쪼꼬렛에 열광하는 것도 아닌데. 아이들아, 너희들의 삶은 이렇게 다르구나. 너희들은 웃는데, 낯선 동양인이 들고 있는 사진기 때문에 잔뜩 흥분한 너희들의 진심이 이렇게 와 닿아 나도 함께 웃고 있는데, 웃는 게 그냥 웃는 게 아니다.


  
라이베리아 이야기 (4)

호텔 아프리카. 
당연히 기억하고 있겠지? 
네가 무척 좋아하던 기억이 나. 
어렴풋한데 그 만화를 생각하면 햇살이 떠올라.

헌데 이 곳에 호텔 아프리카가 있어.
전쟁의 몸살을 앓고 있는 이 도시의 쇠락한 호텔 아프리카.

가상과 현실의 미묘한 접점에서 너를 생각했어. 

도시 외곽으로 달려
야자수 가로수길을 지나 
정박하듯 들어선 곳에 바다를 끼고 
헐벗은 거인처럼 우뚝 선 호텔 아프리카.

흔적으로만 남은 화려한 과거와
자꾸 돌아보게 되는 을씨년스러움.

자유의 땅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나라의 처연한 역설.

+ 사진은 호텔 아프리카는 아니고, 예전 국방부 건물. 
  여느 폐허처럼 이 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건물 바깥쪽으로 널어놓은 빨래들도 간혹 볼 수 있고. 


라이베리아 이야기 (5)

비행기로 오가는 시간 3일 제하고, 시에라리온 공항에 방치되었던 하루 제하고나니 라이베리아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9일뿐이었다. 최소한의 시간 동안 최대한의 효과를 얻어내기 위해 하루하루 바삐 달렸다. 처음 며칠은 점심도 꼬박꼬박 챙겨먹었지만 후반으로 가면서는 도저히 시간이 안 나서 점심 거르기가 일쑤였고, 빈속으로 비포장 도로를 몇 시간이나 달리다가 결국 멀미를 하기도 했다.

도대체 무엇이 그리 바빴냐 하면,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느라 정신 없었던 것. 일요일 하루 빼고, 돌아오던 날이 때마침 라이베리아 국경일이라 인터뷰 일정이 모두 취소되어버린 것 감안하고, 때로는 두 팀으로 나누어 이동한 것까지 따져도 도합 일주일 동안 30회가 넘는 개별 인터뷰와 포커스 그룹 인터뷰를 다니느라 나날이 바빴다. 밤에 게스트 하우스에 돌아와서는 전기 끊기기 전까지 그 날 인터뷰 노트 정리하고. 

이전 번에 말한 대로 [Sexual Exploitation and Abuse in Liberia]가 연구 주제. IRC (International Rescue Committee) 와 CCF-Liberia, Save the Children UK 등의 국제 비정부기구들이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진행하고 있는 CiSEAL (Countering Sexual Exploitation and Abuse in Liberia) 프로젝트가 이런저런 이유로 난항을 겪고 있었는데 때마침 우리 팀이 수집하고 분석할 정보가 이 프로젝트에도 유용히 쓰이게 되어 더욱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다.

+ 사진은 보미 카운티의 여학생들. 
  동네 이름은 어디 적어두었는데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벌써부터 까마득하니, 이것 참. 세스타운 학교에서 선생님들과 인터뷰하고 나서 이동한 동네였는데, women center 사람들과 인터뷰를 짧게 마치고 동네를 조금 거닐 수가 있었다. 마침 학교 수업 마치고 돌아오는 여학생들과 마주쳐서 사진 한 장 찍었다. 다들 참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