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플레이빌

2013.9월 웨스트엔드 공연관람기(2)

10개월 전부터 관람한 공연을 한꺼번에 정리하려니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의욕 생겼을 때 기억 나는 것 위주로 조금이라도 적어두지 않으면 영영 아무것도 적지 못할 것 같아서 용기를 내본다. 

 



2013/9/19 The Curious Incident of the Dog in the Night-time 14:30, Apollo Theatre


Mark Haddon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연극이다. 우리나라에는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으로 번역되었다. 친구의 추천으로 보기로 하고는 이 시기에 공연비로 돈이 너무 나가서 Day Seat를 시도해봤다. Day Seat 표 구매 시도는 처음이라 웹사이트에 아침 10시부터 박스오피스에서 판매가 시작된다는 글만 읽고, 10시에 딱 맞춰 간다고 갔다가 10시 10분쯤 도착했나?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Day Seat는 이미 다 팔렸단다. 그제서야 나의 안일함을 깨닫고 몇 시쯤에나 와야 표를 살 수 있냐고 매표소 직원에게 물었더니 8시쯤 줄 서는 관객들도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이튿날 재시도. 8시 반쯤에 줄 서서 Day Seat를 15파운드에 구매할 수 있었다. 주변 극장에도 아침 일찍부터 Day Seat를 구매하려는 인파가 있었다. 훗날 경험상 마티네 공연까지 공연이 두 번 있는 날이 Day Seat 구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운 것 같다. 보통 1-2열 가장자리를 Day Seat로 판매하는데, 가격 대비 무척 훌륭한 좌석이지만 무대가 높으면 놓치게 되는 부분들이 있어서 그 점은 아쉽다. Apollo Theatre는 무대가 높은 편이라 쿠션까지 빌려다가 깔고 앉았지만 내내 고개 들고 보느라 조금 힘든 점은 있었으나 배우의 감정을 최단거리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은 좋았다. 다만 이 공연의 경우, 1막 내내 주인공 크리스토퍼가 바닥에서 무언가를 하고, 그 결과물을 1막의 마지막에 보여주기 때문에 무대 바닥을 봤어야 했는데 1열에선 무대 바닥이 보이질 않아서 크리스토퍼가 뭘 하는지 중간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다른 극장에서 공연 중인데, 극장마다 무대 높이와 좌석 단차가 다르니 이 점 고려해서 좌석을 고르면 좋을 거다. 


크리스토퍼를 연기한 배우는 Jack Loxton이라는 얼터 배우였다. 이전 시즌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Luke Treadaway는 2013.4월 개최된 올리비에 어워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이 배우는 극중 열 다섯의 크리스토퍼보다 띠동갑 이상인데 열 다섯의 크리스토퍼를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하긴 하더라. 내가 관람한 공연의 Jack Loxton은 얼굴도 몸도 굉장히 어린 느낌이라 자폐증세가 있지만 수학적으로는 천재적인 크리스토퍼의 느낌을 아주 잘 살렸다. 극 중에 크리스토퍼가 젖은 티셔츠를 벗고 갈아입는 장면이 나오는데 Jack Loxton의 몸이 아주 평범하고 살짝 통통한 게 전혀 다듬어지지 않았던 게 몹시 현실적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상반신 탈의했더니 크리스토퍼가 다듬어진 근육질 몸매의 소유자였다면 거짓말 같아서 전혀 몰입이 안됐을 거다.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플롯을 알겠지만, 간단히 설명하면 이웃집 개 웰링턴이 누군가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을 보고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는 (연극에서는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언급은 따로 없고, 사회성이 떨어지고 공황장애를 겪는 등 자폐증세가 있으나 수학적인 천재로 묘사된다.) 크리스토퍼가 범인을 찾기 위해 수사를 나서며 일어나는 일이다. 


스토리도 좋았지만, 무대가 꽤나 모던하면서도 세련되었는데, 특히 런던 지하철 장면이 굉장히 멋지다. 지하철을 타려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모습, 도저히 올라타질 못해서 계속해서 튜브를 놓치는 장면, 철로에 내려갔다가 튜브에 치일 뻔하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무대는 미니멀하게 거의 비어 있는 대신 배우들이 상자를 가지고 움직이면서 활용하기도 하고, 벽이 앞뒤로 움직이며 새로운 장면을 표현하기도 한다. 


연극의 마지막 대사 후 암전의 순간, 나도 울고 내 옆에 아주머니도 우시고. 주체하기 힘든 슬픔과 안도와 기쁨 같은 것이 뒤섞여서 마구 밀려드는데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극이 너무 좋았어서 원작 소설도 샀는데ㅡ무려 Bath의 charity shop에서ㅡ아직 소설은 읽지 못하고 마지막 장면만 봤더니 일맥상통하지만 '평서문'을 '의문문'으로 만드는 변화를 통해 훨씬 임팩트있는 결말을 무대에서 이끌어냈더라. 크리스토퍼의 담담한 어조, 감정에 복받쳐 울먹이던 시오반 선생님의 얼굴,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도 마지막 장면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다. 


이 연극을 보고 나서 극 중 크리스토퍼의 엄마가 런던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꼽은 Hampstead Heath엘 꼭 가 보고 싶었는데, 아직도 가 보질 못했다. 영국을 떠나기 전 Hampstead Heath에 꼭 가보고 싶다. 


참, 책의 annex에도 수학 문제 풀이가 실려 있는 것처럼 끝난 줄 알았던 공연 마지막에 크리스토퍼가 수학 문제를 신내린 듯 풀어주는데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 재기발랄한 커튼콜이다. 



2013/9/20 The Mousetrap 19:30, St. Martin's Theatre


웨스트엔드에서 가장 오래된 공연이라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쥐덫]. 초연 공연장은 아니지만 한 번 옮긴 후 쭉 지금의 극장에서 공연 중인 걸로 알고 있다. 지금 크리스티의 작품을 읽으면서 무섭다고 느끼진 않겠지만, 아주 어렸을 때 엎드려 [쥐덫]을 읽으며 뒤통수가 서늘해서 중간중간 뒤를 돌아보던 기억이 있다. [쥐덫]하면 생각나는 약간 음산하게 느껴지는 동요 [세 마리의 눈 먼 쥐]. 책으로 읽었으니 멜로디를 알리도 없는데, 들어보지도 못한 멜로디가 기억 어딘가에 남아있는 그런 기분. 


폭설로 폐쇄된 하숙집ㅡB&B에 가깝겠지?ㅡ에서 발생한 밀실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초연에서 아무것도 변화시킨 게 없다는데 그야말로 고전적이다. 무대도 배우들의 스타일도 연기도. (그래도 코미디 프랑세즈에서 본 몰리에르 극만큼 고전적인 무대가 또 없었지. 그러고보니 파리에서도 많이는 아니어도 공연을 가끔 보았는데, 아무것도 기록해 놓은 게 없네...) 귀여움에 가까운 고전적인 느낌이라 살인사건 추리극이긴 하지만 전혀 무섭진 않다. 물론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자체가 흥미롭지만 무섭지는 않은 것처럼.    


결말이 너무나 깜찍하게 끝나서 원작의 결말도 이랬나 싶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런 깜찍하고 귀여운 결말이 원작자의 의도가 맞나 싶어 후에 검색을 해봤더니 무대에 올린 [쥐덫]의 희곡도 크리스티가 직접 쓰고 조명까지 관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개입했다고 하니 원작자의 의도가 맞나보다. "너무너무 재밌다!"까진 아니지만, 크리스티의 팬이거나 웨스트엔드에서 가장 오래된 공연을 기념으로 본다는 측면에서는 볼만하다. 그렇다고 표가 저렴하진 않았지만; 



2013/9/25 Matilda the Musical 19:30, Cambridge Theatre


친구의 추천으로 보러갔다. 또 나는 로알드 달의 애독자이기도 하니까. 가능한 한 저렴한 좌석으로 보려고 고른 좌석인데 시야 방해 때문에 관람 기억이 썩 좋지가 않다. 한 번 보더라도 좋은 자리에서 봐야 제대로 관람이 가능한 걸 알면서도 재정적인 면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타협이 필요하니 발생하는 실수. 


플롯은 간단하다.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영민한 다섯 살 소녀 마틸다와 유년 시절의 학대로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해왔던 허니 선생님이 힘을 합쳐 아이들을 괴롭히는 악랄한 트런치불 교장을 물리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이야기. 


아이들이 어쩜 다 그렇게 노래도 연기도 잘하나 싶었는데, 원작이 동화고 타겟층도 어린 관객이다보니 스토리는 다소 단조롭고, 노래도 머리 속에 꽂혀서 떠나지 않는 그런 멜로디는 없다는 느낌. School Song이랑 When I Grow Up은 그 중 기억에 남는데, 특히 길다란 그네를 활용해서 꾸며내는 When I Grow Up의 무대가 참 아름다웠다. 

 


2013/9/26 The Light Princess 19:30, National Theatre


문유님이 알려주셔서 보러간 [The Light Princess]. 어떤 극인지 전혀 몰라 국립극장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살펴보는데 홍보용 이미지가 굉장히 몽환적이어서 기대감이 있었다. 


스코틀랜드 동화가 원작이라는데 플롯은 사전에 알지 못하고 백지 상태로 관람했다. 그러고보니 최근 관람하는 모든 작품이 다 책이든 영화이든 원작이 따로 있는 작품이다. 요즘 예술계에 얼마나 소재가 고갈되어 있는지, 웬만한 건 원소스 멀티유즈인 듯. 그나마 이 작품은 소재는 차용했지만 노래나 무대 표현이나 스토리 다듬기 등에서 창작이 많이 가미되었지만. 


The Light Princess는 그야말로 'light'하다. 여섯 살 적,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부터 신체적으로는 무중력 상태로 둥둥 떠다니고, 감정적으로는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못하게 된다. 둥둥 떠다니며 히스테리컬하게 웃는 공주의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아내를 잃은 후 마음이 차가워진 Lagobel의 왕은 이런 딸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유일한 후계자이기 때문에 왕위를 물려주고 강제결혼을 시키려고 하자, 공주는 탈출을 감행하여 Lagobel과 전쟁 중인 Sealand의 왕자ㅡ공주와는 정반대로 왕자는 어머니를 여읜 이후 웃을 수 없게 되었다ㅡ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역시 관람한 지 너무 오래되어 자세히 기억 나진 않지만, 전반적으로는 기대보다 못했던 작품이었다. 동화를 원작으로 동화스럽게 풀어가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유치할 필요는 없을텐데 전반적으로 유치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기에. 웃길려고 의도한 장면이 아닌 것 같은데 객석에서는 수시로 웃음이 터지는 것도 연출 실패가 아닌가 싶었는데, 프리뷰 기간이었으니 추후에 조금씩 수정이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음악은 내게는 좀 평이했던 반면 무대 미술은 몹시 근사했다. 일단 떠 다니는 공주는 어떤 장면에서는 스트링 장치도 보조로 달아두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항상 아크로바틱을 하는 검은 옷의 사람들에 의해 물리적으로 떠받들어지고 붙들리는 식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이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Sealand의 왕자를 만나 Lagobel의 호수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도 천을 사용해서 표현한 호수의 움직임이 굉장히 아름다웠다. 공주가 유일하게 중력을 되찾을 수 있는 공간인지라 그만큼 중요한 공간으로 등장하는데, 미술적으로도 표현이 잘 되었다는 감상이다. 


극은 좀 아쉬웠지만, 국립극장에 처음 가봤는데 그 공간과 주변 분위기가 너무 좋더라. 강변 따라 산책길도 있고, 극장 앞엔 중고 책 시장이 좌판으로 서고, 전체적으로 주변과 조화로우면서 쾌적하고 널찍한 게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