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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드 데이즈

추억이 되는 기억, 2005/07/12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어제는 문득 
홈페이지를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시달렸더랬다. 

엄청난 지적의 소산, 
유용한 정보의 창고, 
아무리 퍼도 결코 마르지 않을 우물물 같은
블로그와 홈페이지를 만나게 되고서는

어줍잖은 감정의 분출구, 
자기 전시용에 불과한 공간, 
오히려 오프라인의 관계와 삶을 
소원하게까지 하는
이 모순적인 공간을 

어쩌지도 못하고 
5년씩이나 끌고 온 게 
과연 잘한 일인가 싶어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반성하였다. 

재단할 건 재단하고
거를 것은 또 걸러내어 
보여지는 웹에서의 모습이 
얼마나 표면적인가 싶어서
내가 어디까지 부풀려져 있을까 싶어서.

인터넷에 난무하는
쓰레기같은 웹페이지와
결국은 별 다를 것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성급한 결론까지 내리고나니 
속이 시큰한 것이 아주 묘한 기분이 들었다. 

웹에 일기장 하나 마련하겠다고
홈페이지를 만들었던 건 아니었는데. 
어리석은 감정의 분출구와 자기 전시장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허나 그 고민은 잠시 접어두고,

그칠 줄을 모르고
하루종일 주룩주룩 내리던 비가 
거짓말같게

아침에 맞은 하늘은 
적운이 낮게 떠 있는 파아랗고 맑은 하늘. 
쨍한 여름이었다, 여름. 

새벽녘의 빗줄기 탓이었던지
아니면 곧 떠날 날이 다가와서인지
추억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이전에 결심했던 바대로
일을 그만 둔 이후로는
새벽같이 출근할 필요가 없어
조신하게 버스만 이용하고 있는데
충대 앞에서 집까지 운행하는 
농어촌 버스와 대전 시내 버스의 
환승 시각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길바닥에 버리는 시간 없이 뿌듯하게 
버스 라이프 진행 중이다. 

예방접종 증명서와 치과 치료 때문에 
오늘은 이곳저곳 이동해야 할 동선이 꽤나 큰 날이라
버스를 다섯 번을 타고 돌아다녔는데
완벽한 버스 스케줄로 명쾌하고 깔끔한 기분으로 
하루 외출을 마무리할 수가 있었다. 

적시에 도착하는 버스에 올라타는 기분이란- 
버스 접근성이 쉽지 않은 곳이라 
환승할 생각하고 잡아탄 버스였는데, 
목적지까지 운행하는 것을 알았을 땐
길바닥에서 돈이라도 주운 심정이랄까. 

요가 수업을 마치고 
어렸을 적 다니던 소아과에 가서 
예방접종 증명서를 받으려고 
도마네거리로 가는 704-1번 버스를 탔는데
만년동에서 둔산동을 지나 
도마동쪽으로 가까워질수록
나의 유년 시절의 추억들이 
하나씩 하나씩 상자 속에서 슬그머니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어려서 
그 가난을 잘 몰랐으나,
우리 가족이 많이 가난했던 시절을 보낸
가장동 근처에 이르면
떠오르는 추억은 항상 같은 모습이다. 

동네 목욕탕 가려면 
늘 지나쳐야 했던 
오르막길 언저리의 
장미 넝쿨이 아름답던 벽돌집,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늘 들여다보았더랬다.   
나도 저런 집에 살고 싶다며
들어가보지도 않은 집의 구조를
머릿속에서 다 그렸더랬지. 

무척 신고 싶었던 신발. 
아주 예쁜 샌들을 사 신고 자랑하던 친구에게
나 한 번만 신어보자고 사정하여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같던 그 샌들을 신고는
가슴 설레어 하고 있는데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오빠에게 거지도 아니고 
왜 남의 신발을 얻어 신냐며
호되게 혼이 나서 

울면서 언덕길을 뛰어내리다가 
그만 넘어져 양 무릎팍이 깨져버려
더 크게 울어버렸던 기억. 

그 때 내가 아마 예닐곱쯤 되었지 싶다. 

그러고보니 
같은 길은 아니지만
그 길도 오르막길이었다. 
교회 근처 오르막길 혹은 내리막길. 

고무 대야에 담겨 있는 
완두콩을 뭐가 그리 재밌다고 
껍질을 쏙쏙 벗겨가며 콩을 참 열심히도 깠었는데. 

생활비에 보태시겠다고
시장 한 구석 좁은 자리에 앉아
둔덕에서 뜯은 쑥이며 나물이며 
이것저것 찬거리를 파시던 우리 할머니. 

가장동을 지나면 그런 기억이 떠오른다. 

그 낡고 허물어가던 
오층짜리 주공아파트는 이미 무너지고
이제는 벽산 블루밍이며 삼성 래미안이며 하는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섰건만
그곳을 지날 때면 환각처럼 늘 같은 풍경을 본다. 

일곱살 유치원생
병원 그림 속에 등장하던
낮은 건물 1층의 '김영유 소아과'는 
'클리닉 빌딩'같은 식의 이름이 붙은  
전문 클리닉이 여럿 입주한 새 고층 건물 4층에 자리해서

더 이상 그 기억 속의 병원이 아니었고
의사 선생님도 많이 늙으셔서 
그리고 더 이상 소아가 아닌 
나도 나이가 너무 들어버려서
서로가 서로를 잘 기억할 수 없었지만

그 곳에서 만나는 
조금 더 자란 나의 
또 다른 추억 한 토막 한 토막. 

돌아오는 길에는 
111번 버스를 탔는데, 
근처의 동네 하나하나를 지날 때마다
그 추억 속의 나도 조금씩 나이가 들어간다.

당시 새로 지어서 
번쩍번쩍하던 아파트는
새로운 입주자들을 한창 몰고 다녔는데
세월 따라 그 광채도 지워졌으며
지나갈 줄 몰랐던 시절들은
그렇게 다 지나가버렸다. 

행복한 시절도 
괴로운 시절도 
한데 섞여 아련하게만 남았다. 

피아노 레슨 받는다고 
일주일에 한두번은 꼭 다녔던
동네를 지나면서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열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예고에 가서 계속 피아노를 치라던 
피아노 선생님들의 조언과 격려를 웃어넘긴다. 

익숙한 동네를 
거치고 거쳐서 
버스는 결국 나의 현재의 이야기를 
생산해서 후에 추억으로 가공할 지역, 
충대 앞까지 이르렀는데
정류장에 풋사랑이었던 그 아이가 서 있다.

나도 모르게 반가워서 
손을 흔들어보지만 
그 아이의 시선은 뒤쪽으로 도착하는 버스에 향해있다.

좋아했었는데. 
별을 보며 걷다가 
웅덩이에 빠져버린 그 아이를 한 때는 좋아했었는데. 

전화 통화는 고사하고 
밤늦게 쓴 편지를 
조심스레 교환하는 것이 전부였고
어디서 따로 만나 데이트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열다섯의 두 소년소녀는
이미 너무도 자라버렸다. 

영문도 모른 채
흐지부지 정리된 관계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지름길 놔두고 일부러 돌아서 
그 아이 집앞을 지나가기도 했는데
그 집 앞에서 그네를 타면서 
나와라, 나와라 주문을 걸기도 했는데

어느 저녁
생각지도 못하게 
그 아이와 마주쳤을 땐
그 아이도 나도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앞뒤에서 몇 발짝을 떨어져서 
계속 걷기만 했었는데

다시 돌아서서 인사도 하지 못했고
어떻게 된 거냐고 묻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정류장에 서 있는 
수염 자욱이 선명한 그 아이를 보면서
마냥 반가워서 손을 흔들어버리는 나는
어디까지 와 있는 걸까.

돌아갈 수 없는 시절들이 
가슴팍에 아로새겨져
언제고 같은 형상으로 
꺼내어 볼 수 있는 추억들이 되고 말았으니. 

나는 자라지만, 
영원히 성장을 멈추어버린 추억들이 
이 상자 저 상자 속에 채워지고 있으니. 

"추억엔 힘이 없어요."
3년이 지나서야 돌아온 희진에게
삼순이 매몰차게 쏘아붙였지만, 
삼순이 그녀가 정말로 그리 믿는다곤 생각지 않는다. 

"내 몸이 너를 기억한다"며 울던 삼순이
추억엔 힘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리가 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추억에는 힘이 없는 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그 시절에 박제된 추억,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시절, 
이따금 상자 속에서 툭 튀어나와
마음판을 휘젓는 그 추억만 더듬어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미 이만큼 자랐고, 
벌써 이만큼이나 걸어왔는데. 

추억은 선물. 
옛날 사진첩 뒤적이며
얻게 되는 미소만큼의 선물. 

아픔도 슬픔도 괴로움도 
웃으며 기억하게 만드는 시간의 선물. 

어제가 되는 오늘, 
추억이 되는 기억,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며 살고 싶은 
이 길 위의 나. 

유년의 시절을 
헤집고 다니도록 
만든 그 버스 몇 대 덕분에
나는 또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감사한다. 


p.s.

사진은, 
그리스의 산토리니섬. 

오늘 곧 출국할 지은언니와 
네팔에서 금방 돌아온 현아언니를 만나 오후의 티타임 

(근처에 새로 연 빵집에 구경갔다가 
섹시 쿠키라는 마들렌을 한 사람 앞에 하나씩 사왔는데
찻집이라기보다 커피집이어서 어울릴만한 음료가 없어 조금 안타깝긴 했지만)

그리스 여행을 다녀온 지은언니의 
사진 구경하면서 부러움과 감탄의 연속. 

누구한테 들었는지 기억은 나질 않지만, 
석양에 온 섬의 하얀 건물이 붉게 물들어 
장관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꼭 한 번 가고 싶은 산토리니섬. 

석양에 물든 산토리니섬의 사진은 찾기가 어려워 
카페의 빈 의자가 담겨 있는 Neil Emmerson의 사진을 옮겨오다.


음,,저 사진을 보며 생각한게..저거 그런데 정말 실물크기의 의자일까? 아무리 봐도 조명이 영 어색한게 소품같단 말이지.. 손바닥만한 크기의..^^07.12  
그래도 누군가를 만나 얼굴보며 할 수 없던 이야기를 웹에서 할 수 있다는건 좋은거 같아.. 뭐 누가 관심을 갖던 안갖던.. 일단 마음은 좀 가벼워진달까..^^07.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07.13  
오랜만에 대전에 오니 나도 기억이란, 추억이란 무엇인가 되새기고 또 생각하게 돼.07.13  
소리wintertea/ 그런 생각은 안 했는데, 언니가 얘기하니까 조명이 좀 어색한 것 같기도 하고... 헌데 설마 소품을 갖다 놓고 찍었을까. 아니길 바라는 마음. ^^

wanderer/ 아니, 그 큰 입은 뭐란 말입니까. 

흄/ 같다고는 할 수 없어도 비슷한 느낌을 느꼈구나, 우리.
07.14  
언니, 이 글 너무 좋다. 위로가 되었어. 닫아 건 마음의 문이 조금 열리는 듯한, 그런 느낌.07.14  
소리

sadbike/ 위로가 되었다니 좋다... 보이지 않는 곳에도 무언가가 있다는 것.


+ 이런 글을 대체 내가 언제 썼단 말인가, 싶게 생경하면서도 

  다시 읽으면서는 당시의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나서 당혹스럽다. 


  이 글을 쓰고 난 지 8년만에 산토리니에 결국 가게 되었다는 것, 

  비록 혼자만의 여행이었지만 석양에 붉게 물든 이아 마을을 봤다는 것, 

  현재에서 바라보는 과거로 이어지는 선과 점들이 참 특별하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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