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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드 데이즈

푸른 해군들의 Amor Dei, 2009/09/08

몇년만에 무궁화호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혹시나 구운 계란을 파는 카트가 지나갈까 기대해보았지만, 객차를 정리하거나 좌석 때문에 실랑이하는 승객들을 안내하기 위해 두어 번 역무원이 오간 것 말고는, 두 시간 내내 간식거리를 담은 카트는 보이질 않아 내심 아쉬웠다. 

역에서 내려 집으로 직행하지 않고, 1956년 찐빵집으로 시작한 오래된 빵집 <성심당>을 찾아 아주 오랜만에 구 도심을 누볐다. 우리 가족에게도 그렇거니와, 아마도 이 곳은 대전 시민 모두에게 오래된 단골 빵집이 아닐까. 하도 오랜만이라 가물가물 이 골목이 맞나, 이쯤이 맞나 두리번거리며 길을 찾아갔다. 진작에 쇠한 상권이 신 도심으로 옮겨간 지도 한참이니 역전 구 도심이 낡아보이는 것이 당연할 터인데도, 얼마 전 기억에 비해서도 너무나 조잡하고 낡았으며 비좁은 시내를 돌아보며 아주 묘한 기분이 들었더랬다. 익숙한 장소들이 이렇게 전혀 다른 공간으로 낯설게 다가오는 순간이 종종 있다. 

파티세리 섹션도 만들고, 베이커리 뿐 아니라 대중적인 푸드 코트, 적당히 세련된 이탈리안 음식점, 제과제빵/요리 클래스까지 별도로 운영하며 성업하는 성심당은 겉보기와는 달리 여전히 옛날 빵집 같은 곳이다. 여전히 이 곳의 주력 품목은 몽블랑, 마카롱, 휘낭시에, 뜯어먹기에도 아깝게 잘 성형된 유기농 호밀빵이 아니라 앙금이 꽉찬 맨들맨들한 팔빵, 우유랑 먹으면 제격인 소보로, 꿀카스테라, 뽀얗게 먹음직한 찹쌀떡, 막 쪄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인지 빵인지 분간하기 애매한 녀석들인 것이다.  

한참을 돌아보며 고민하다 너무 평범하다 싶은 옛날 빵들을 몇 개 고르고, 그냥 카스테라보다는 약간의 배리에이션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 오렌지 리큐어를 발라 만든 카스테라 같은 오렌지 케이크가 먹음직해 보여 샀는데, 아... 이렇게 맛있는 빵은 간만이었다. 촉촉한 카스테라가 새콤달콤한 오렌지 리큐어와 환상적으로 어우러지는데 홍차랑 곁들여 먹으면 딱 좋겠더라. 지금도 고 예쁜 빵이 아른아른. 너무 평범한 것 같던 다른 빵들도 눈에 보이는 만큼 정직하고 실하게 맛있었고. 

배불리 먹고, 뒹굴며 읽고, 그러다 낮잠도 자고, 일어나 또 저녁을 먹고, 주말 드라마를 보고, 그 후엔 집 주위를 맴돌다가 방충망으로 돌격해 찰싹 달라붙어 깜빡이는 반딧불이와 밝디 밝은 달도 구경하다가, 생전 화투 쳐 본 적 없다는 친구에게 가르쳐준다고 식구들 모다 둘러앉아 화투패도 만지작거리다가, 선선한 시골 밤을 그리 잤다.  

그리고, 본론은 이제부터인데ㅡ :-)

아침식사를 든든히 하고, 이른 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러 갔다. 간밤의 잠이 참 달았어서 상쾌한 기분이었는데다가 최근 그 어떤 설교보다도 가장 강력하고 가장 마음을 움직이던 말씀에 나는 조용하고 은밀하게 흥분하였다. 미가서를 기본 말씀으로 하여 이사야서도 봉독하였는데, 무릇 경건한 예배로만이 아닌 의로운 삶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지극한 진리였다. 구하지 않은 곳에서 답을 얻은 기분이었다. 

4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5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6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4-6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이사야 1:11-15

아, 어쩌면 여기서부터 진짜 본론인가보다ㅡ

당연한 진리이나 누구도 쉽게 얘기하려 들지 않는 이러한 말씀이 맺어진 후에, 해군 군악 신우회의 특송이 이어졌다. 아무리 많아봤자 이십대 중반, 평균 스물 둘 정도가 아닐까 싶은 하얀 해군 제복을 입은 청년들이 위에 링크한 Amor Dei를 부르기 시작했다. 바이올린, 첼로, 베이스의 현악기와 트럼펫, 색소폰의 관악기 등으로 이루어진 연주에 맞춰 네 청년의 찬양이 시작되었다. 

와. 이 푸르디 푸른 청년들의 사중창이 얼마나 천상 같던지. 예배의 정점을 찍는 듯, 감동이 전율로 밀려들었다. 유명한 CCM 가수인 박종호씨의 노래보다도 더 깊이 마음을 두드리는 노래였으니. 오죽하면 주일 예배 특송을 녹음으로 뜨고 싶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들었을까;;; 네 명의 청년 중 풍부한 바리톤으로 기둥을 잡아주던 두 명은 성악 전공자인 듯 했고, 한 명은 정식 훈련을 받은 것 같진 않지만 아주 맑고 깨끗한 테너로 주멜로디를 굉장히 멋지게 소화해내며 마음을 휘어잡더라. 다른 한 명은 주로 코러스를 담당해서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고. 넋빠지도록 멋진 찬양을 마친 후, 이 청년들 갑자기 각 딱 잡고 팔을 올려다 붙여 경례를 하고 내려가는데 정신이 번쩍 들지 뭔가. 사람이 제 눈의 모양을 자유자재로 변형할 수 있다면, 아마 그 때 내 눈은 하트 모양을 하고 있었을 거다. (웃음)

예배의 특송이 아니라, 콘서트였다면 사인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정말 감동하였노라고 한 마디 말이라도 전하고 싶었지만, 어린 청년들 앞에서 부끄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으로만 인사를 전하고 예배를 마치고 돌아나오는 길. 단체로 버스를 타고 부대로 복귀하는 그들 중 바리톤을 담당했던 청년에게 아빠가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우자 차창 안에서 잠시 쑥스러운 듯 하다 바로 경례를 취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더라는... :-)

그러다가 불쑥, 홍이 생각나지 뭐던가. 그 아이도 군악대였잖아. 그 시절, 그 어린 시절, 이처럼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를 부른 적 있을까. 또 그러다가 문득, 홍의 Amor Dei가 너무나 듣고 싶어졌다. 이 세상의 모든 노래를 홍에게 부르게 하고 싶지마는, 특히 이 곡에 홍의 음색과 가창을 입히면 정말 천상 같은 노래가 될 것 같아서.  

(아니, 결론은 결국 또 홍인가;;;;;;)

늘상 하는 패턴대로 주제 없이 흐르는 글을 용두사미식으로 수습해보자면, 인간은 정말로 소리나 빛으로 이루어진 게 아닐까. 음악이, 노래가 내게 주는 감동이란 어찌 그리 무한한가. 끊임없는 파동으로 공명하는 그것 덕분에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하고 절망케도 되고...
comment [11]
090908  del
캬~ 멋진 글입니다. 그런데 홍으로 흐르는... 소리님의 일편단심. / 미가 6:4-6 말씀은 최근에도 뜨끔. 여기서도! >.<
퍼플
090908  del
ㅋㅋㅋ 뭘 보고 들어도 결국 모든 생각의 종점은 홍? ㅋㅋㅋㅋ
소형
090908  del
끊이없는 파동으로 공명하는 그것 덕분에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하고 절망케도 되고... 
오~ 소리님의 이 표현에 저는 또 무한한 감동을 받고 갑니다. 
중반부분에서는 말씀에 감동을... 
마지막에서는 잠시 말씀을 잊고 소리님 표현에 감동을... ^^
소리
090908  del
보라쟁이/ 제가 은근히 일편단심 민들레과예요 ㅎㅎㅎ 저는 이사야서가 화끈(?)하게 와닿더라구요 ^^ 제대로 살라는 말씀에 한방 먹었슴다~ 

퍼플/ 전 일관성 있는 여자니까요? <-막 이래 ㅠㅠ 한동안 의연하다 싶더니, 증세 시작되었어요 ㅎㅎ 오페라의 유령 전초 증상인 듯 하옵니다;;;;; 

소형/ 용두사미식 급마무리가 마음에 드셨던 거로군요! ㅎㅎ
090908  del
감동적이고 장엄?하게 나가다가..홍으로 마무리! 맘에든가.ㅋㅋㅋㅋ
소리
090909  del
나리/ 나리야, 너두 빨리 홍 월드로 입문해라... 그럼 내 심정을 알거야. 으하핫.
진희 :)
090910  del
아, 성심당이야기에서부터 홍까지- 맘을 훈훈하게 하는 좋은 글이었어요, 아, 대전가고 싶다.
090911  del
찬양도 너무 좋고 네 글도 참 좋다..!
090911  del
난 요새 박규도령에 버닝중이얌. ~~~
소리
090912  del
진희/ 아, 그랬지. 대전이었지. ^^ 

지혜/ 지혜야~ 지혜야~ 우리 얼른 봐야는데! 언제 서울 올래. 진영이랑 둘이 날 맞춰서 와. 

나리/ 박규도령이 뉘냐. ㅎㅎ
은미
090913  del
노래 이제서야 들었어. 넘 멋지다 *ㅡ* (그 와중에 홍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건 뭐냐며..ㅋㅋ)//그나저나 윗에 분 박규..귀양다리..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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